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05. 포기는 없고 생존만 있는 그곳

by 기린

이 글은 국제개발협력 프로젝트 수행자로 한동안 팔레스타인을 드나들면서 경험한 일들을, 오랜 세월이 지나 '웰다잉을 위한 웰빙의 삶'을 전하는 몫으로 삶의 방향을 다잡아 가면서 다시 정리하는 글입니다.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켜낸 것들.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면 짧게 답했고, 설명을 요구해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그 침묵이 왜 그렇게 낯설었는지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실수를 했을까, 우리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그들의 조용함이 실망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이 마음 한편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그 침묵은 무기력의 결과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선택된 방식이었다는 것을. 말은 힘이 될 수 있지만, 그 힘이 언제나 안전하지 않았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냈다. 어떤 사회에서는 말하는 순간 기록이 되고, 기록은 질문이 되며, 질문은 다시 통제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침묵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기술이었고, 불필요한 위험을 피하는 지혜였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말하지 않으면 패배라고 생각한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배운 것은 달랐다. 존엄은 언제나 외침의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존엄은 때로 조용히 자신을 지켜내는 태도로 나타난다.

image.png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침묵에는 분노가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현실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그 경계 감각은 살아본 사람만이 갖는 능력이다. 우리는 침묵을 쉽게 오해한다. 말하지 않음을 무관심으로, 조용함을 체념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어떤 침묵은 존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다.

image.png 알 수 없는, 이해가 안 되지만 이곳에는 분명 메시지가 있었다

우리는 종종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가장 큰 존엄일 수 있다. 모든 삶이 큰 목소리를 허락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삶은 존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침묵은 그 권리를 지키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침묵의 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심는 일

팔레스타인의 침묵을 이해하게 되었을 즈음, 그제야 척박한 땅에서 창업과 취업을 지원하는 국제개발협력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경제적 자립을 돕는 단순한 사업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삶 깊숙한 곳에 닿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프로젝트와 연계한 청년들과 소통의 시작은 그리 쉽지 않았다. 조심스럽지만 세심한 관찰, 어느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서로를 말하고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살피며 짧은 답들을 이어갔다.

침묵은 더 큰 준비를 위한 몸부림이었고, 프로젝트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자, 그들의 침묵은 작지만 강한 변화들을 내어놓았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기술을 이야기했고, 오래 숨겨두었던 꿈을 펼쳐내며 창업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말은 여전히 크지 않았지만, 그 작은 말들 속에는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의지가 너무나도 강하고 굳게 담겨 있었다.


개발협력은 목소리를 키워주는 일이 아니라, 목소리가 안전하게 나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공간은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침묵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웰다잉을 향한 길 위에서 다시 떠올린 팔레스타인,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웰다잉을 위한 웰빙의 삶’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침묵의 얼굴들이 자주 떠오른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어떤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가장 큰 평온일 수 있다.

존엄은 반드시 말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말하지 않을 권리, 조용히 머무를 권리,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그 사람의 마지막 품위가 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에서 배운 침묵의 의미는, 결국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닿아 있다.

삶은 소리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때로는 침묵이야말로 가장 깊은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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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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