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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유목민 Aug 15. 2021

위기의 아내가 알아야 할 열한 가지(from오소희작가)

108배 수행 10일째 (21년 8월 15일)

오늘은 108배 수행을 하면서, 기억나는 것들을 곱씹어본다. 

아버지를 받아들이기까지 40년이 넘게 걸렸는데, 

이런 과정은 쉬운것이 아닌라고 되뇌어 본다. 

내 마음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이런 마음도 내 마음이고 저런 마음도 내 마음이다. 그런 마음들을 한 원에 모아놓고 가장 현명한 결정이 무엇인지 생각해내야하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얼마가 걸릴지 모르겠지만.



위기의 아내가 알아야 할 열한 가지 (오소희 작가 블로그 원문)


첫째, 부부싸움은 ‘너랑 살고 싶다’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런 전제를 한 번 해봐요.


우리 못난 인간들은 세련되고 아름답게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시간과 공을 들여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두 부부는 열심히 싸우는 와중에,

별거도 하고, 조언도 듣고, 책도 들여다보며

자신들에게 꼭 맞는 싸움법을 만들어내게 된다.

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싸움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인간이 만나서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자연스런 일이며

무서운 무관심이다.


싸움은 모자란 둘이 만나서

그래도 끝까지 ‘너랑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서투르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

둘째, 재결합할 때는 무조건 죄를 사하고 시작합니다.


헤어지지 못한다면

한 번 더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면

"이건 네가 잘못했고, 이건 내가 잘못했으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지금 가장 밑바닥에서 새로 일어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아직도 이 사람을 '원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고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지금껏 그가 지은 죄는 지우개로 쓱쓱 지워버립니다.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같으며

이번 결혼에서는 처음부터 잘 해봐야겠다는 맘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용서해 주었기에 내가 윗자리를 차지하고

그가 잘못을 저질렀기에 아랫자리를 차지하는 시작이 아닙니다.

그러한 불평등이 이전에 꼭 싸움으로 이어졌음을 압니다.

그래서 평등하게,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재결합입니다.




*

셋째,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화해서 바라봅니다.


내 갈등상황을 비극적이고 특수한 상황으로 보는 관점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사 다 어렵고 힘든 법인데

내가 무지몽매한 저 수많은 중생 중 한 명으로써 이렇게나 답을 못찾고 헤매고 있구나,

저 인간도 답을 못 찾아 똑같이 헤매고 있구나, 정도로 바라봐야 하죠.


모두 다 이 길을 걸은 뒤에야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났고

결혼생활에서 행복을 일궈내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하세요.


사람 일이 실제로 다 그렇지 않습니까?

십대 때를 떠올리면, ‘아. 내가 그땐 정말 뭘 몰랐지’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결혼이고 육아고 모르니까 하는 거고

배우고 이겨내면서 한 고비씩 넘어가는 거죠.

인생 내내, 이혼을 해도, 그런 일의 연속입니다.


고통과 자기연민으로부터 나를 떼어내고

‘모두가 가는 길을 잘 걷고 있다’ 생각하면

힘도 나고 나아갈 방향도 보입니다.




*

넷째, 배우자의 단점과 장점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결혼 전에는 장점이었던 것이

결혼 뒤에는 단점으로 둔갑합니다.


집을 나가버리는, 독단적이고 과감한 남편의 모습은

ㄱ님이 재혼이었어도 연상이었어도 개의치 않았던

바로 그 용감한 모습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마 결혼 당시에는 그 독단적이고 과감한 모습이

시댁 쪽에 불통과 폭력이 되었을 겁니다.

ㄱ님에게는 힘이 되었을 거고요.


다시 말하면,

사람이 바뀌었다며 내 발등을 찍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변함없으며,

그의 특징이 내 필요에 따라 장점도 되었다가

내 불필요에 따라 단점도 되었다가 하는 거지요.

내가 그의 같은 모습을

싫을 땐 ‘독단적’이라고 불렀다가

좋을 땐 ‘자기주도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현명한 사람은

바뀌지도 않은 배우자가 바뀌었다고 한탄하기보다

그의 특징이 내게 적대적으로 쓰이지 않고

내내 힘이 되도록 쓰이는 요령을 빨리 익힙니다.




*

다섯째, 화해는 필요한 사람이 먼저 청하는 겁니다.


폭력,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나쁘지요.

그런데 여기서 누가 먼저 반성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일어나는가는

안타깝게도 '더 잘못한 놈'이 하는 게 아닙니다.

'개선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죠.

잘라내기에도, 이렇게 살기에도

더 괴로운 사람이 먼저 화해를 시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부터> 개선하는 겁니다.

집안이 어질러져 쑥대밭이 되었을 때

(어지른 사람이 아니라) 더 못참겠는 사람이 일어나

<자기 발치에 놓인 물건>부터 치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부부싸움이라는 건 언제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둘 다의 허물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의 허물만 손가락질하고 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히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습니다.


내 목을 내리쳐도,

내 새끼를 걸고도 그 짓만은 못하겠다,

하면 헤어지면 됩니다.


하지만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한 번은 더 해보겠다 싶으면 노력해 보는 겁니다.


말했듯이,

밑바닥부터 새롭게,

겸허한 마음으로.




*

여섯째, 화해를 할 때는 <나>로 합니다.


먼저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여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 자리에서는 <너>(의 잘못)에 대해 언급하지 말고

<나>(의 잘못)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시간을 갖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이러이러한 점 때문에 네가 힘들었을 거야.

네가 그때 그렇게 흥분할 만 했어.

앞으로는 내가 말을 조심해서 할게.”


무조건 1인칭 화법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제야, 남편 역시 1인칭 화법으로 말할 겁니다.

혹은, 이 언어적으로 떨어지는 족속이 겉으로 말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속으로는 생각할 겁니다.


‘나도 잘한 건 없는데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건 고맙네...’


사랑도 못 받고 있다고 느끼고, 열등감까지 가득한 마음에 잠시 쉼터가 생기지요.


‘아내가 나를 그렇게 형편없는 놈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구나.’


그리고 나면 한 걸음씩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의 아주 먼 어느 지점엔 가사분담도 있겠죠?




*

일곱째, 싸움에도 원칙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가장 격렬해진 순간에 쉬었다 얘기한다.’

‘끝까지 결정적인 말을 내뱉지 않는다.’


의외로 간단하지만, 싸우는 중간에 실천하기는 아주 어려운 항목들입니다.


격렬해진 순간에 쉬었다 얘기하지 못하면

결정적인 말을 내뱉게 되고

결정적인 말로도 충분히 제압하지 못했다 싶으면

폭력이 이어집니다.


책읽는축복맘님의 댓글이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저도 그 기본 개념에 온전히 공감합니다.


천천히 읽어 보시면

폭력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전문가들이 말하는 '부부싸움의 기술' 가운데

‘결정적인 말을 내뱉지 않는다’에 해당하는 부분이지요.


즉, 마지막 1도를 건드리지 않는 거지요.

99도까지는 끓지 않지만

100도에서 끓어 넘치잖아요.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부부가 싸울 때에는

상대방의 컴플렉스나 트라우마를 건드려서라도,

상대를 폭발시켜서라도,

‘이기고 보겠다’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어리석은 일이죠.


그 직전에 멈춰야 합니다.

둘 중 한 명만 멈출 줄 알면 됩니다.




*

여덟째, 이미 상처받았다면 재빨리 번역기를 돌립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런 말(행동)을 할 수가 있어?'라고

상대방의 표현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무력한 감정의 수렁에 빠져요.

우울증에 걸리고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럴 땐 이렇게 생각하세요.

‘미련한 놈, 네가 궁지에 몰리니, 나를 공격할 방법으로 이것밖에 못 찾아냈구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고

상대방을 연민하는 쪽으로 감정을 전환시키는 방식이죠.


그렇게 되면 점차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나의 모습도 보이게 됩니다.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가지 않을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죠.

훨씬 건설적인 ‘싸움 뒤처리’ 방식입니다.


싸움 뒤에는 절대 남겨진 감정에 휘둘리지 마세요.

의식적으로라도 머리를 차갑게 하고

싸움의 패턴을 복기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 마지막 1도가 분명히 숨어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애초에 99도까지 가지 않고도 해결할 여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많은 남편들이 술자리에서 ‘아내가 무섭다’고 말합니다.

개들이 무서울 때 더 짖듯,

아내에게 폭력적 성향을 보이는 남편들은

사실 심리적으로 아내에게 억눌려 있는 남편일 확률이 큽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아내를 다룰 줄 모르기 때문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쉽게 넘는 거죠.


ㄱ님의 남편은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열등함을 무마시킬 수 있는 게 아내로부터 넘치게 받는 사랑인데

지금 전남편에게 애정적으로까지 밀려나 있어요.

게다가 전남편은 집안일까지 잘했죠.

그에게 집안일에 대한 지적은 단순히 집안일에 대한 지적이 아닐 겁니다.

99도는커녕 55도에서도 마지막 1도로 치닫는 경우죠.

독단적이고 과감한 사람은 조곤조곤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기 감정 표현에 미숙하죠.

설명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곧바로 상황을 종료시킬 자극적인 어휘와 폭력으로 건너뛰죠.

(사실 많은 남자들이 언어보다 주먹을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번역기를 돌립니다.

‘아이를 보러 오겠다’는 통보형 문자는

‘화해하고 싶다’입니다.

ㄱ님은 이때 집을 비우고 눈을 안 맞출 게 아니라

열심히 눈을 맞추고 부드러운 대화를 시도하면서

집안 분위기를 가족적이고 화목한 분위기로 이끌어야 했습니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표현에 미숙한 그가

매우 미숙한 방식으로 화해의 제스쳐를 취했으니

그것을 좀 더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았어야 했던 거죠.

그는 고따위로 문자를 보내 놓고도 ㄱ님이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아마

‘내가 화해하고 싶다고 했는데도 무시당했다’고 여길 겁니다.


그렇다면,

남편의 긴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번역기를 돌린다면, 당연히 ‘헤어지기 싫다’입니다.

두려움 때문이든, 자식 때문이든.

물론 ㄱ님의 침묵도 같은 걸 의미했죠.

하지만 애석하게도, 번역기를 돌리는 능력은 항상

오감과 언어적 능력이 뛰어난

여자 쪽에 좀 더 많습니다.


말씀 드렸듯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하는 겁니다.




*

아홉째,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내 이별방식을 살펴보세요.


내 이별방식이 내 문제해결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가부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가 싫어서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남편과 연인 사이였지만 꼭 결혼을 해야 할 상황은 아니었죠.

심지어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막 군에 입대한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했습니다.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그렇게 자식도 낳고 십수 년이 지나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정말 ‘악’이어서 탈출 밖에 답이 없었냐?

절대 아니었죠.

그것이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제가 선택하는 솔루션이었을 뿐이었던 거죠.


같은 방식으로 이혼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이 남자가 정말 ‘악’이냐?

주변인들에게 해를 끼치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냐?

아니죠.

사회생활은 멀쩡히 하는데 나하고만 불화합니다.

사실 결혼서약이라 함은

그가 사회에서 버림받아도 ‘나만은 너를 사랑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었죠?


그렇다면 이제 나의 문제가 됩니다.

나는 왜 늘 이렇게 이별하는가?

왜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도 미워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가?

왜 잘라내는 것에서만 답을 찾는가?

왜 미친 듯이 덤벼들어 답을 찾아내지 못하는가?

어미로서 자식을 걸고는 그래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별의 원인을 상대에게서 찾으면 자꾸 바뀝니다.

외도가 되었다가 폭행으로 둔갑한 것처럼.

다음엔 뭘까요?

무엇이 올지 내가 알 수 없죠.

알 수 없으니 통제할 수도 없죠.

그럼 자꾸 끌려다닙니다.


그러므로,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나의 살아온 방식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그때에 주도적으로 주변을 통제할 수 있고

문제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정말로 아직도 전남편을 가장 의지한다면

바람 핀 당시 그를 용서하고 그와 사는 게 합당했습니다.

끊어지지 않은 연 때문에 자꾸 맘속으로 지금 남편을 비교하고 있으니까요.

이건 비교가 되는 남편 탓이 아니라 자꾸 비교를 하는 사람 탓입니다.

지금 남편 입장에선 처음부터 페어플레이가 아니었던 거죠.

남편은 자신이 1번이 아니라는 걸 느낍니다.

남자 중 그런 걸 본능적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ㄱ님께서는 내내 자신을 내친 사람 때문에

자신을 선택한 사람을 내치고 있었다는 걸

자각하셔야 합니다.


이 부분을 진심으로 속죄하고

몇 배로, 지속적으로 남편을 사랑해주는 것 외에는

그의 상처가 치유될 수 없습니다.


꼭 전남편, 전아내, 전애인이 아니더라도,

특정한 대상이 없더라도,

‘저 남자가 아니었으면... ’

‘저 여자가 아니었으면...’ 하는 배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랑 받지 못하는 아이는 여러 가지 돌출행동을 하죠?

친구를 때리고 욕도 합니다.

그 돌출행동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면 더, 더, 더, 나빠진 돌출행동을 하죠.

결국 가출도 하고 도둑질도 합니다.

그래서 이럴 때 엄마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나무라고 미워하기보다

“너를 믿는다.”며 더 많은 사랑을 주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오직 사랑을 충분히 받은 아이들만

“엄마, 재활용 좀 도와줄래?”라는 말에 저항 없이 엉덩이를 일으키죠.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가사분담을 논할 때가 아닙니다.




*

열째,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덜 잃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 돈 얘기는 아니고요.^ ^;

(돈도 중요하죠.)

'관계의 손실'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싸움이 길어지고 악화되면

애초에 내가 싸워서 얻고자 했던 것이 무언인가가 흐릿해집니다.

반드시 애초에 문제가 발생한 지점으로 돌아가서,

결과적으로 지금 내게 주어진 득실을 따져봐야 합니다.


ㄱ님의 경우, 집안일 좀 나누려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집안일을 거들어주기를 원했지 이혼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길어진 별거기간 동안 결국 혼자서 가사와 육아를 도맡게 되었죠?

그런데 할 만 하잖아요?

그렇다면 함께 있을 때도 ‘그래, 육아와 가사는 나 혼자 하자, 넌 돈 벌어오고 아빠 노릇이나 잘해라’ 라고 마음을 먹었다면 어땠을까요?

기준선을 그쯤으로 낮추고 남편을 편하게 놔주었다면 어땠을까요?

(특히나 그는 자기주도적인 성향의 사람이므로) 그가 마음이 동할 때,

아빠로서나 남편으로서 좀 더 성숙해져서 자발적으로 가사의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기다려 주었다면 어땠을까요?


ㄱ님이 정직하게 말씀하셨듯이

36개월이 안 된 아이 입장에서나, 몸이 약한 아기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나

당장 아이를 어디 맡기고 나가서 일하는 것보다는

당분간 돈 벌어오고 아빠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 든다면 말입니다.


대부분의 위기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이란,

가장 이상적인 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죠.

배가 난파될 때 선장이 내리는 선택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

마지막으로 열한째, 잡상인은 빼버립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고민해야 할 주인공은 딱 셋으로 줄입니다.

나, 남편, 아이!

나머지는 다 잡상인입니다.

시어머니든, 내연녀든... 고민 대상에서 제외시킵니다.

그리고 위의 십일계명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그러면 주연급이 아닌 잡상인들은

세 주인공의 튼실해진 관계 속에서

절로 설자리를 잃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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