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뒤죽박죽 세계여행 20화)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새 삶을

페낭으로 새 삶을 찾아

by 꿈꾸는 유목민


캐나다 다녀와서 남자친구와 지내는 일은 많이 힘이 들었다. 분명 좋은 순간들도 있었을텐데, 남자친구는 말로 행동으로 내 맘을 많이 찔러댔다. 그러면서도 놓치못했던 그 끈은 잠시 좋은 순간들을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마, 그 근본원인을 찾아들어가자면 아마도 둘의 자라온 환경부터 처음 사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의 과정을 다 설명해야하지만, 나의 여행 에세이에 그런 분석은 필요 없을 것같다.


캐나다에 다녀와서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나는 단기간에 살이 5킬로가 빠질 정도로 힘들어했다. 친구와 유럽 패키지 여행도 다녀오고, 매일 매일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그 친구들과 노래방에가서 매일 같은 슬픈 노래를 부르며 거의 1년을 보냈다.


이제 더 이상 바닥을 칠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다른 연애를 시작했고, 그 사람과의 연애는, 아니! 연애가 이렇게 즐거운거였어? 싶을 정도로 맛있는거 먹으러 다니고, 좋은 거 보러다니면서 나를 아껴준다는 느낌이 들게하는 그런 보통의 연애였다. 그래서 마음이 치유되어가고 있을 무렵, 그 사람은 연락이 끊겼다.. (나는 왜 이런 연애만 했던 것일까..) 몇일 후 연락이 닿아서, 헤어지고자 해도, 이렇게 연락을 끊고 헤어지는 건 아니지 않냐고 하면서, 만나자고 했고, 들어보니 어머니가 선생님 며느리를 원하는데, 나와의 만남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에 아버지 친구가 소개해준 여자 선생님과 소개팅을 하였다고... 그때 인연을 끊어버렸어야하는 건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사람은 나름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나는 그걸 느끼면서 한국에서 살기 싫어졌다.


거기다가 아버지의 사업까지 많이 기울어, 부모님도 하루가 멀다하고 많이 싸우셨다.


외국으로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해외에서 직장을 구하는 건 어렵다. 그리고 그 소스가 나와있지도 않다. 딱히 지역을 정한건 아니였는데, 누구나 알고 있는 잡 사이트였던 곳에서, 말레이시아 페낭 xxxx 한국인 구함/ order management (먼지 모름)을 보고, 이메일과 이력서를 보냈다. 그 기업은 내가 일했던 분야에서 유명한 미국 회사였기 때문에 이름을 알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연락이 왔다. 너무 쉽게 연락이 와서 해외 취업 사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분은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한국인 메니저로 일하시는 여성 메니저였고, 몇 주 후 한국에 가는데 면접을 보자고 하셨다.


한국 지사는 여의도에 있었다. 한국인 메니저 분은 키도 크시고 깡 마르신 분이셨고, 나를 편안하게 해 주시려 노력하셨다. 그리고, 면접이 당락을 결정하는 면접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페낭에서의 생활은 어떤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말레이시아 페낭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강원도 시골이다... KL(콸라룸푸르)과는 다르다, 페낭은 섬이고 중국인들이 제일 많다..등등.. 다시 미궁속으로 빠졌다.. 나 그냥 붙은거야?


어쨌든 합격 통지를 받았고, 나와 함께 말레이시아로 갈 직원들은 모두 6명, 나이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미혼 여성들이었다. 부산, 대구, 청주, 서울, 인천등 다양한 지역의 사연있는 싱글들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한달동안 여의도에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육을 받았다. 그 회사는 오라클이라는 ERP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업무는 한국의 영업 사원들이 한국 업체에서 오더를 받으면 그 오더를 시스템에 입력하고, 선적 날짜를 관리, 각 나라에서 오는 제품들을 페낭의 창고로 집하시켜 한국으로 선적 시키는 업무였다.


교육받는 내용으로 보면, 취업사기는 아니다. 하지만 한달간의 교육을 마치고 우리가 말레이시아로 입국하는 날짜를 잡아야하는데 취업비자가 빨리 승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기로 했던 날짜보다 계속 밀리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왜 가는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냐며, 해외취업사기 아니냐며 엄청난 걱정을 하셨다. 가지말라고, 가지말라고 나를 설득까지 하셨다.


다행히 비자가 나왔고, 한달동안 교육받으면서 친해진 우리들은 공항에서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출발했다. 그때 우리 엄마는 공항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셨는데, 나는 정작 눈물이 핑돌기만 했고, 같이 출발하는 나보다 한살많은 언니가 우리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고 같이 펑펑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엄마한테 왜 그렇게 우셨냐고 했더니, 그 이후에 영원히 못볼 줄 알았다고 하신다. 아마도, 호주로 이민가신 작은 고모나, 삼성에서 주재원으로 미국 가셨다가 삼성 그만두시고 미국에 눌러앉으셔서 한참을 사셨던 큰외삼촌의 케이스에 대한 학습효과였던것 같다.


우리는 총 6명이었으니, 2명 씩 나눠서 레지던스 호텔에 2주일, 호텔에 2주일을 머물며 우리가 살 콘도를 구하러 다녔다. 레지던스는 너무 좋았고, 메니저의 말씀과는 달리 페낭은 강원도 골짜기 같은 시골이 아니라, 도시적인 면모와 관광지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는 밝은 도시였다.

나는 나보다 한살 많았던 언니와 같이 살 집을 구하러 다녔고, 무려 펜트하우스를 한달 월세 60만원(?) 정도에 구하는 호사를 누렸다. 펜트하우스이긴 하지만 그렇게 펜트하우스 스럽지는 않다. 그냥 딱 둘이 살 정도로 적당한 정도의 크기였다. 우리가 구한 곳은 회사에서도 차로 약 20분 떨어진 곳이었고, 콘도 안에는 수영장, 헬스장, 탁구장등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컬리사라는 아주 작은 중고차도 구입하고, 말레이시아 페낭에서의 생활 셋팅이 모두 완료되었다.

말레이시아 페낭은, 나의 삶의 터닝포인트였다. 한국이 싫었고, 한국에는 나에게 상처주는 것들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적시적소에 찾아온 인연 같은 그런 곳.


페낭에서의 삶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페낭에 간 10개월동안과 10개월 이후의 삶이 갈라지게 된다.


가족들이 페낭으로 옮겨오기 전과 옮겨 온 후...


말레이시아 페낭은 우리 가족에게 아픔의 끝이자 시작이고, 감사함의 시작이고,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된 곳이다.

일단은, 가족들이 페낭에 오기 전의 나의 자유로운 페낭의 삶에 대해서 생각나는 단편들을 조금씩 꺼내보고자 한다.


꿈꾸는 유목민

세계여행의 기록

말레이시아 페낭


#세계여행의기록 #세계여행에세이 #말레이시아페낭 #페낭직장생활시작 #말레이시아페낭은동양의진주 #뒤죽박죽세계여행 #말레이시아페낭의기억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뒤죽박죽 세계여행 19화) 홍콩에서 만난 홍콩 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