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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세계여행 24화) 말레이시아 페낭, 가족

페낭으로 가족들이 오다

by 꿈꾸는 유목민


말레이시아 페낭에 오기 전에 나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듯이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힘든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착각을 했었고 (힘들었다는 이야기), 아버지 사업도 기울어져 부모님 사이도 극도로 좋지 않았다. 그당시 페낭으로 갈때는 새로운 삶을 찾아간다기보다는 도망간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페낭에 가서 열심히 펍도 다니고, 일 배우고 그러는 동안, 동생은 캐나다 어학연수에서 돌아와서 직장을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은 더더욱 기울어지고있다는 소식에 마냥 페낭의 삶이 즐거울 수는 없었다.


비치까페라는 우리가 자주가는 호커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며 함께 사는 언니와 이야기하다가, 우리 부모님이 페낭에 오셔서 홈스테이를 운영하시면 어떨까? 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말레이시아 페낭이 가족들이 함께 조용히 살기에 좋은 나라이니 괜찮을 거라고 의견을 주었다. 당장 집에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하였고, 부모님은 처음에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나는 좀 더 생각해보라고 하고 한국으로 휴가 가는 날짜를 잡았다.


한국에 가 있는 2주 동안 가족들은 페낭에 가기로 결정했다. 은행 경매에 넘어가기 직전의 집은 내가 말레이시아로 돌아가기 이틀전 밤 11시에 팔렸고, (아파트는 엄마가 분양받아서 마련하신 정말 소중한 집이었는데, 우리가 판 이후에 엄청 올라서 엄마가 한동안 너무 힘들어하셨다)


여동생은 원래 한국에서 직장을 구해서 혼자 한국에 남기로 하였었는데, 그게 잘 안되서 엄마, 아빠, 여동생 모두 페낭으로 오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페낭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이 함께 살 집을 구해야했다. 같은 콘도에 다행히 집이 있었고, 나는 그걸 급히 계약을 했다. 월세는 약 45만원정도에 방 세개, 화장실 두개가 딸린 집이었다. (그때는 엄청 쌌는데, 요즘은 엄청 올랐을 듯..) 말레이시아는 약 3개월 월세를 한꺼번에 디파짓으로 내고, 다달이 월세를 내는 구조로 되어있는데, 그 당시에 내가 돈이 조금 모자랐다. 그런데! 2주마다 월급을 받게 되어 있는데, 어느 월급 날 3달치의 월급이 한꺼번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나 말고도 다른사람들도 몇명 그랬는데, 회사의 실수로 한꺼번에 월급이 입금된 것이다. 이걸 전부 다 회수해서 다시 정상으로 받거나, 아님 다음 회차 월급에서 까나가는 식으로 선택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콘도의 디파짓을 충당할 수 있었다.



몇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엄마가 수원역에서 점을 본적이 있었는데, 그 사주 보시는 분께서 딸 덕에 해외에 가서 살겠다는 말을 해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무시했다고 하는데, 그게 현실화되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어쨌든, 가족들은 무사히 페낭에 도착을 했다. 여동생은 같은 한국팀에 취업을 할 수 있어서 더 다행이었다. 부모님은 토요타 엔서를 중고로 구입하였고, 나는 부모님을 한인교회에 살포시 넣어드렸다. 젊은 사람들이야 한인 사회에 동화되지 않아도 되지만, 부모님 세대는 각 지역 한인교회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페낭 한인 교회에 계신 목사님 부부는 너무 좋으셨고, 부모님은 페낭 교회에 잘 적응하셨다.


부모님은 한국에 계실 때 거의 무교에 가까우셨다. 그런데 페낭에 가서 사시면서 그곳에서 감사한 마음을 종교에서 많이 찾으셨던 것 같다.


부모님은 7년 동안 교회분께서 사업체에 등록을 해주셔서 몇 년간은 아무 문제없이 지내셨고, 그 이후에는 태국으로 3개월마다 비자여행을 다녀오셨는데, (말레이시아 무비자가 3개월마다 갱신해야했기때문에) 이때는 나도 경험해보지 못한 태국으로 왕복하는 침대기차도 타보시고, 코사무이도 신혼여행처럼 다녀오시기도 했다.


부모님이 페낭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같은 팀의 친한 언니가, 그럼 여기서 우리 한국팀을 위한 점심 도시락을 싸 주실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다들 싱글들이라 밥을 해먹기도 하고, 나가서 외식을 하기도 하지만, 집 밥이 다 그리운 터였다.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을 하셨고, 도시락 통에서부터 도시락을 담을 수 있는 바구니까지 모두 구입을 하셔서, 매일 점심 도시락을 싸주셨다. 한국팀은 모두 15명, 아침에 도시락 주문을 받아서, 부모님께 전달하고 부모님은 그걸 준비하셔서 11시 30분까지 회사 게이트 앞으로 가져오셨다.


우리는 점심시간마다 모여서 회사 식당에서 도시락을 먹었는데, 중국 친구들이 관심이 많았고 어쩔땐 중국친구들도 주문을 해서 하루에 주문량이 40개가 넘을 때도 있었다. 부모님은 매일 아침 시장에 가셔서 고기를 떼어오시고, 신선한 야채들을 구입해 정성껏 도시락을 싸주셨다. 가장 인기있는 반찬은 돼지고기 김치 두루치기와 비빔밥이었다. 동생과 나는 매일 점심시간에 나가서 도시락을 픽업해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힘들기도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이 도시락으로 한달 생활비를 버셨다. (도시락 하나에 10링깃 - 3천원정도...)


내가 초등학교때 우리집은 만두가게를 했는데, 그 때의 경험으로 아버지는 만두를 만드셨고, 부모님은 우리 회사에서나 교회에서 비정기적으로 만두를 주문 받아, 만드시곤 하셨다. 그래서 큰 돈을 벌진 못했지만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부모님이 가지고 있었던 돈을 최소한 까먹지는 않았다.


나는 가족이 페낭에 온 후 1년뒤에 한국에 돌아왔지만 동생은 1년 더 있었고, 부모님은 7년 정도 더 계시다가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비자문제와 아버지 건강문제로 더 이상 계실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페낭에 있는 산이나 해변을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계셨는데, 어느 날은 산을 오르다가 중국 청년들과 친구가 되셔서, 함께 집으로 초대를 받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페북으로 안부를 물으시는 것같다) 엄마는 페낭에서 운전을 하시다가 엠뷸란스랑 큰 사고가 나신 적도 있고 (다행히 안다침), 아빠도 집앞에서 사고 가 나서 벤지와 함께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쓴 적도 있다. 두 분은 두리안을 너무 사랑하셔서 (난 못먹는다) 두리안을 찾으러 말레이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시골까지 찾아가시기도 했다.


우리 가족에게 말레이시아 페낭이란, 슬픔의 기억이기도 하고, 변화의 기억이기도 하고, 우울의 기억이기도하고, 좋은 경험의 기억이기도하다. 함께 살았던 동안 한국에서 살때와는 다르게 더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계속 붙어있어야하니), 인생의 잊지 못한 기억일 것이다.


엄마는 페낭에 계실때, 제목이 '페낭에 부는 바람'이라는 글을 쓰고 싶으시다고 하셨는데, 얼마전에 여쭤보니 쓸필요가 없다고 하신다 ㅎㅎ



꿈꾸는 유목민

세계여행의 기록

말레이시아 페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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