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었고 유럽의 해외 법인에서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럽 사람들이었다.
나는 독일, 스웨덴, 헝가리를 담당 하였는데, 유럽 사람들이라고 다를 것도 없고, 그 사람의 특성이 모든 유럽사람을 대변할리도 없다. 그냥 그 사람들은 각각의 성향을 가진 자신들의 나라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유럽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독일 직원들 중에는 사샤 와 요한나가 있었다. 둘은 같은 일을 하고 있었고 항상 나란히 교육에 참여하였다. 둘은 독일 사람답게 그렇게 freindly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협조적이지도 않았다.
그당시 리더로 함께 갔던 직장 동료가 그들앞에서 시스템에 엑셀을 올리다가 몇번을 실패하였다. 그들 중 한명의 비웃음이 있었고, 그 직장동료는 울면서 뛰쳐나갔다. 그날은 먼가 풀리지 않는 날이었을 수도있다.
나는 클레임 파트도 맞게 되었는데, 제품을 선적하거나 창고에 보관시 파손, 좀도둑, 분실등등이 일어났을때 시스템에서 처리하는 프로세스를 설계하고 본사인력에게 개발시키는 그런 업무였다.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서 그 둘에게 교육을 시키는 시간이었다. 자기네들이 몇년을 일해봤는데 클레임이 발생할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며 굉장히 따분해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커다란 분실이 일어났고 (제품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벽돌이...) 그들은 부랴부랴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7년 후, 내가 육아 휴직 복직하자마자 독일 출장을 갔는데 아직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남자들 왜 이러는걸까요.. 얼굴에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수염도 온 얼굴을 덮게 길렀다. 7년전에 그 날렵한 사샤는 어디갔냐며 놀려주었다.
독일법인 담당자 중에 나딘이라는 20대 여성이 있었다. 독일 사람답지 않게 밝고, 다혈질이고, 유난히 덜렁거려 실수도 많았던 나딘.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독일 프로젝트가 끝나고 영국에서 첫 결산을 할 때, 나딘은 꼭 보내주셔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해서 (잘 못해서.. 옆에 둬야 안심) 영국으로 왔었다.
점심시간에 밥 먹고 영국 법인을 돌면서 사진도 찍었다. (사진은 싸이월드에..)
그리고 10년 후 그 밝고 명랑했던 독일 아가씨는 뇌종양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리고 생각나는 막강파워 보배 아저씨.. 이름이 보배라고 해서, 당신의 이름은 한국어로 Treasure라고 하니까 좋아했다. 그분은 그 당시에도 재무쪽에서 높은 사람축에 속했는데 나의 어려움과 고민을 잘 들어주는 아주 인자한 분이셨다.
그때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기억은 안나지만, (50대였을듯?) 밴드 활동도 하고 계셨다. 공연도 가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가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7년 후에 독일 출장에서 다시 만난 보배 아저씨는 더 멋진 할아버지(?)가 되어 계셨다. 그리고 독일법인의 가장 중요한 결정권자였는데 (한국인과의 파워게임에서 절대 밀리지 않으시는..) 사람들은 보배 아저씨가 최고 결정권자가 아니라 그 분의 여자친구인 청소하시는 레이디가 가장 권력자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사무실을 청소하시지만 모두가 그 청소하시는 레이디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고..
직업과 연애에도 편견이 없는, 독일. 좋다.
마지막으로 나의 헝가리 친구 코박 가보르이다. 어느것이 성이고 어느것이 이름인지 기억 나진 않지만 헝가리에서는 참 흔한 성, 흔한 이름이다. 외모는 좀 나이가 있어보였는데 그당시 나와 동갑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 이후에 내 친구 가보르라고 하며, 좀 챙겨주었는데 손이 많이 가는 친구였다. 손도 느리고 이해력도 좀 늦어서, 이 친구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매일 나머지 공부를 시키며 교육시켰다.
이름이 코박이라서 (성일지도 모름) 코박이가 코박고 일한다고, 우리끼리 재미있어했던 기억..
오.. 코박.. 지금 생각났는데 1년 후 폴란드 프로젝트를 할 때, 헝가리의 클레임 사용에 대한 예를 교육해달라고 폴란드로 불렀는데, 한걸음에 달려와준 아주 고마운 친구다. (그때 사진도.. 싸이월드에..)
코박이는 그 이후에 영업으로 옮겨서 아주 승승장구 잘 나가고 있다. 역시 사람은 맞는 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