씀씀이를 줄여도 막막하다.
티끌이 태산이 될 수 있을까?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은 언제가 긴 밤의 끝인지 절대 알지 못한다. 서서히 밝아짐이 보여야 직전이 어둠의 끝임을 알기 마련이다. 눈을 감을 여유가 있으니 밤이 짧게 느껴지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보면 밤의 길고 김을 알 것이다. 가난 이란 밤처럼 질리도록 길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나름 신분이 안정된 직장임에도 100만 원 중반대의 월급으로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지 않았다. 돈을 모았다기보다 쓰지 않아 남은 잔고들이 쌓여 몇 달이 지나니 300만 원가량 되었다. 계속 이리 누적이 되면 좋으련만 부모님과 대학생인 동생에게 필요한 일이 생기다 보니 탈탈 털어 보내기 일쑤였다.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도는 기분이었다.
졸업 전 사립학교 쪽에서 연락이 왔다. 특별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20대 젊은 남교사를 찾는 모양이었다. 면담은 재단 이사장과 있었고 나 이외에 지원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날짜를 달리해 면담을 했던 모양이다. 공립보다 급여가 약간 높다고 하며 매리트를 자랑했지만, 난 면접 중 들었던 생각에 포기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사립학교에 발을 들였다면 그곳에서 가장 가난한 이는 바로 나였을 것이다.
그땐 이런 문제가 아니라 과연 이 월급을 받아가며 서울에서 생활이 가능할까라는 불안함이 있었다. 내가 내세운 표면적 거부 이유는 미션스쿨 종교 강요였으나 실은 나의 앞날이 막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방 중소도시도 실상 내겐 버거웠다.
티끌도 모으면 태산이라 했는데 그 작은 티끌도 난 모이지 않았다. 1년 직장 생활로 내게 남은 돈이라고는 이사를 위해 쓴 빚 마이너스 2천만 원뿐이었다.
월급에서 조금씩 차감하는 방식이라 벼랑 끝으로 내쫓기는 위기감은 없었으나 적은 급여가 더 줄어드니 나아지리란 기대는 접었다.
이듬해가 되니 급여가 올랐다. 월급으로 치면 2만 5천 원, 연봉으로 게산해도 30만 원이다. 산너머 산이라고 이런 추세라면 쥐구명에 볕이 들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