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했다. 이 말을 실천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땐 이런 문구를 담아둘 여유도 없었다.
아내와 난 처지가 비슷했다. 같은 과의 후배였기도 했다. 자주 보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챙기게 되었다. 그렇게 스며들듯 만났다. 끼니를 챙기고 감기약을 건넸다. 티끌을 나눠 건넸던 것이다. 아내보다 1년 먼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아내도 다음 해 발령이 났다.
5년의 연애 끝에 결혼이었지만 이 또한 빚으로 시작했다. 결혼식 준비부터 들어간 비용 모두 아내와 둘이 하다 보니 바빴다. 내 나이 28, 아나 나이 25 결혼이다 보니 가진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하고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잡은 이유 또한 가난이었다. 정말 가난은 곳곳에서 발목을 잡았다. 가난은 선택지를 가장 협소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원흉이었다.
아내나 난 적금과 예금의 차이도 몰랐다. 그 누구도 우리 부부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살아오면서 이를 배울 기회도 없었다. 당시 3천1백만 원짜리 15평 아파트에서 우리 부부의 삶은 시작되었다. 천만 원가량 장기대출이 있었기에 이를 승계하면서 빠듯하게 집을 구입했다. 가구 하나 새것으로 장만하지 못한 신혼살림의 시작이었다.
그럼에도 내 집이었다. 거실 겸 방, 작은 방, 좁은 주방 겸 통로와 작은 화장실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가난 끝에 겨우 내 것 하나를 우리는 만든 것이다. 20년 넘은 작은 아파트에 들인 것이라고는 도배뿐이었다.
마르크스는 결혼을 계급의 재생산이라 했다. 내게 결혼도 그러했다. 다른 계층을 만났다면 한쪽은 분명 수시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결혼이지 싶다.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연결을 넘어 내 가족과 상대측 가족이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 해서 계층을 뛰어넘는 연애가 비현실적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배려하고 보듬어 주는 이들이 만난다면 이 또한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가난에 찌든 내가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또 받을 수도 있기에 이런 판단을 했을 뿐이다.
가난은 바운더리도 달리하게 만든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날 기회까지도 매우 협소하게 줄인다.
아내나 나나 더 많은 기회 혹은 선택지가 있었더라면 다른 삶을 살았을 테고 서울과 대전 태생인 우리가 만났을 확률은 아마도 더 희박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슬아슬한 외길뿐이었기에 어쩌면 난 그 위태로운 길에서 아내를 만났지 싶다.
결혼 초기 아내는 새집이란 꿈을 키웠다. 나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아파트 분양을 덥석 시도한 것이다. 불안했지만 해준 것도 없는 나는 뒤만 따랐다. 아내와 나의 총자산이라고 해봐야 3천만 원뿐이었는데 1억 1천3백50만 원짜리 아파트를 덜컥 계약했다. 아내는 좋아라 기뻐했지만 난 속으로 불안했다.
아내는 정말 마른 수건을 쥐어짰다.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고 지출을 줄였다. 옆에서 보기에 아내의 가계부는 참 요상했지만 말이다. 수입은 줄이고 지출은 두배로 늘리는 희한한 계산법이었다. 그때는 말하지 않았고 이제 와서 가끔 농담 삼아 말하면 아내도 웃기는 한다. 덕분에 생각보다 조금은 빠르게 돈을 모아갈 수 있었다. 물론 입주 시기까지 저 엄청난 금액을 모을 가능성은 제로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