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면 흔들릴 때 기댈 수 있다. 위험한 순간 꼭 붙들면 된다. 과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든든함이 있다. 물론 든든한 버팀목을 공기처럼 누리는 이들은 알아채지 못한다. 뿌리내릴 흙이 있을까 싶은 이들은 버팀목의 위력을 안다.
가난은 하고 싶은 것을 앗아간다. 명을 이어갈 것들만 보이도록 만든다. 일상이 하고 싶은 것 자체를 지우도록 만들고 생계를 위해 해야만 하는 것들만 남긴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길만 보인다. 길이라도 평탄하고 완만하면 좋으련만 거친데다 가파르기까지 하니 삶의 이유나 존재의 여유를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서해안 고속도로 현장에서 했던 막노동 아르파이트는 푹푹 찌는 여름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를 마한정 빗자루로 쓸어내는 일이었다. 3번 표장 하는 중간중간 먼지가 쌓이면 접착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35도가 넘는 폭염, 검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난 하루하루 지쳐 쓰러져 곯아떨어지기 바빴다. 그렇게 벌었던 150만 원 남짓한 돈은 부모님의 채무를 위해 이모에게 송금했다.
더위를 참으며 일했고 온몸은 바짝 말라갔다. 어렵게 쥔 돈 또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봉투째로 이모에게 허탈한 마음을 다잡으며 건넸다.
직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참고 또 참다가 결국은 폭발했다. 이래저래 거슬리게 했던 한학번 아래 동료는 내 핸드폰을 빌려가서는 배터리가 거의 방전될 상태로 돌려주었다. 통화시간은 무려 한 시간 반. 통화시간에 따라 돈을 지불했던 시기 난 이 어이없는 후배년 덕에 3만 원가량의 돈을 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 또한 화가 났으나 참았다. 그렇게 연말 즈음해서 이년께서는 아이를 통해 파일철 하나를 보냈다. 나보고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쪽지와 함께 말이다. 내업무를 기록한 서류를 살폈다. 분명 내 일이 아니었다. 나도 우리 반 아이를 시켜 파일을 돌려보냈다. 몇 분 뒤 이년께서 잎문을 두드린다. 잠깐 할 말이 있다면서 말이다.
"일을 시키면 하셔야죠. 왜 돌려보내나요?"
"내 일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요."
인상을 잔뜩 쓰더니 내게 선배가 시키면 하는 것이지 말이 많다고 한다. 내가 이년에게 선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 싶었다. 결국 나는 폭발했다.
"뭐! 넌 95학번이고 난 94학번인데 내가 당신의 후배라니! 그리고 업무분장에 있는 당신 일을 왜 나한테 떠넘기는데!"
내 언성이 높아지자 분위기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같은 동성이었다면 면상을 갈겼을 테지만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참았다.
20여분 옥신각신하다 끝이 났다.
처음부터 어이없는 일을 참지 않았으면 이렇게 자신의 일까지도 내게 미루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가난이 내게 준 참고 넘기는 것이 친숙해지니 참 별 일을 다 당하고 살았다.
가난이란 불안감이 몰고온 참을성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