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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eajigi Mar 31. 2023

옹졸한 선입견의 틀을 깨다.

경험이 항상 긍정적 잔재를 남기지는 아니한다.

  "뜻대로 삶은 진행되지 않는다."

 살아오는 과정에서 순간순간의 선택이 매번 옳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기에 그릇된 쪽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진중한 고민이 자충수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심지어 내선택이 아닌 운명이 나를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목덜미를 잡아 끄는 일도 허다하다.


 "모든 경험의 흔적은 깊게 남아있다."

 삶의 잔재는 운 좋은 성공이든 지독한 불행이든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생의 생채기를 남긴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이런 지나온 경험들의 누적은 대상에 대한 선입견을 누구나에게나 깊게 심어주기 마련이다.


 "선입견은 지나온 경험의 투영이다."

 첫인상이라고들 말한다. 우리가 누구 혹은 무엇인가를 너무도 쉽게 속단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20년 넘게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를 대하다 보니 너무 쉽게 대상을 범주화시키고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징후가 엿보이거나 사안이 발생하면 본능적으로 과거 경험을 뒤적여 연결 지어 버린다.


"속단은 눈과 귀를 가린다."

 선입견에 빠져 속단이란 단추를 작동시키면 눈과 귀로 들어오는 정보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상의 모든 데이터를 자의적으로 곡해하기 시작할 뿐이다. 색안경은 내가 쓰고 상대가 가면 바꾸기를 한다는 자기 합리화에 깊게 빠져버린 것이다.


"차분히 복기하면 패착이 보이기 마련이다."

 바둑기사들은 대국이 끝나면 복기란 것을 한다. 양측이 첫수부터 다시 두면서 상대의 실수를 짚어주거나 혹은 자신이 생각한 더 좋은 수를 나눈다. 인생도 누군가와 이렇게 지나온 시간을 복기를 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적어도 내겐 없었다. 글을 쓰면서 누군가를 이해해 보려 시도를 하게 된다. 대상을 깊게 파고들려는 노력 속에서 나의 옹졸한 식견을 직면하곤 한다. 이 얕은 삶의 지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한다. 자행했던 지나온 일들에 너무도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글은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글을 쓴다고 끄적이다 보니 내가 나를 복제하는 일들만 반복하고 있었다. 벗어나야만 했다.

 새로운 대상이 필요했고 그동안 외면했던 독특한 성향의 아이들에게 눈이 갔다. 지독하게 소심한 아이들부터 선택적 함구증까지 이제껏 내 능력 밖으로 멀리했던 이들을 내 글의 주인공으로 선정한다.

 객관적 데이터들을 수집하고 행동을 관찰한다. 글을 쓴다고 오래 잡고 있다 보니 이따금 내가 멀리했던 아이들 입장으로 들어가는 상상도 하게 된다. 물론 충분한 이해를 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하는 행동 이면을 바라보려는 시도는 이전보다 그들에 대한 수용적 태도의 폭을 확연히 넓히게 된다.


 나에게 옹졸한 선입견의 틀은 쉬이 깨지는 것은 아닌 듯싶다. 벗어나려 하지만 방심하면 그 늪에 다시 빠지기 일쑤기 때문이다. 짬짬이 글을 쓰는 시간은 빈번하게 속단하는 나를 일깨워 준다.

 글쓰기는 적어도 선입견의 틀이 견고하게 닫히는 것은 막아주고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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