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당

미운 정 & 고운 정

by Aheajigi


연애를 해봤다면 알 것이다. 좋고, 또 좋고, 더 좋은 연애 끝에 결혼한 이들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마음을 맞추는 사랑에는 짜릿함 뿐만 아니라 아픔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내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상대에게 송곳이 되어 꼽히기도 하고 상대는 괘념치 않는 일이 내게 비수가 되어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그런 과정 끝에 평생 함께하기로 모두 앞에서 공식적으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가슴 시린 사연들이 왕왕 생기고 그것을 극복해 가면서 정은 더 깊어졌던 듯싶다. 적어도 내겐 와이프와 5년의 연애가 그러했다.


가르치는 학생들과 갈수록 정이 옅어지는 까닭이 뭘까 했다. 연락처 삭제를 넘어 연결된 모든 수단을 차단하는 나의 행동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나 되뇌어 봤다. 몇 년간 이유를 몰랐다. 그냥 내가 빈번히 아프고 수시로 번아웃이 찾아와서 그러나 했다. 안타깝게도 늙어감에 따라 텐션이 떨어진 것 때문인가 했다.


그 답을 연애에서 찾았다. 예전 학생들과는 밀당을 했지만 언저부터인가 밀당이 사라졌다.

1년간 학생들과 잘 지낸다. 병가로 결근할 날을 사전에 공지하면 빠지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들으니 말이다. 교실에 내가 있는 게 좋다 하니 고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아이들과 오래 연을 이어갈 생각은 없다.

'도대체 왜일까?'

민원이 늘어감에 따라 난 아이들에게 해야 할 싫은 말들을 상당 부분 속으로 삭힌다. 좋은 말들이야 예전과 다르지 않지만, 싫어할 듯싶은 잔소리는 가급적 입 밖으로 내뱉지 아니한다. 고칠 점을 혹은 더 낳아질 수도 있는 점을 아이들이 듣기 싫어할까 봐 표현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비굴하게도 생업을 지키기 위해 민원에 시달리지 않으려 학생과 학부모 눈치를 보는 것이다. 이전처럼 말하면 난 해마다 정서적 아동학대로 고소당했을 것이다.


깊은 정이 쌓이려면 고운 정뿐만 아니라 미운 정도 들어어 하건만 이제 학생들과 미운 정이 겹겹이 쌓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수년 전부터 학생들과 쌓인 정은 상당히 얕다. 안타깝거나 궁금하거나 하지 않다. 해가 지나면 이전 연도 아이들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올해 스승의 날을 앞두고 이전 학교 아이들이 반시간을 걸어 찾아왔다.

"잘 지내고 있지!"

이건 걸어 온답시고 고생한 아이들을 위한 립서비스였다. 찾아온 아이들에게 미안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아이들이 먹고픈 간식들을 안긴 뒤 재빨리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었으나 서둘러 헤어졌다. 난 작년 학생들이 불편했고 서먹서먹했다. 이미 가슴에서 지워버린 과거의 아이들이었기에 한가닥이라도 연결된 정이란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빈번하게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해 달라 교사인 내게 주문한다. 그네들의 속내는 좋은 말만 해달라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로서 당신들은 자녀들에게 매번 좋은 소리만 하는지 궁금하다.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자녀에게 하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

아들을 키우는 아빠로서 난 아들을 보물처럼 아끼지만, 잘못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잔소리를 한다.


반쪽짜리 옅은 사랑을 해달라기에 학부모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뿐이다.

만나고 잊고 하니 아이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게 되고 겨울방학이 되면 리셋이 된다.

우연히 지나쳐도 과거에 함께했던 학생들이 먼저 아는 척하지 않는 이상 알아보지 못한다. 가끔 알아본다 한들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하지는 않는다.

1년 한시적 유통기한을 갖는 인연이기에 마음속에서 폐기처분된 학생은 내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학생들과 연결고리를 단호하게 끊어내는 까닭이 밀당에 있었음을 오늘에서야 인지했다.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그리고 세상이 이리 변하도록 만들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익숙해지니 이제 오히려 편하긴하다. 세상이 요구한 방향으로, 법적으로, 시스템상으로 흘러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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