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있어 사회생활의 시작은 가정이다.
부모는 아이의 전부이다.
"우물 안 개구리라 했다."
자각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모른다. 부족함을 깨달았을 때 변화는 시작된다. 우물 입구 끝 작은 구멍이 바깥세상의 모두라 착각하는 개구리의 모습이 한심하다 생각들 한다. 정작 스스로가 개구리가 된 입장이라면 그 캄캄한 공간에서 작은 빛 한줄기 들어오는 도달할 수 없는 그곳을 외부세계의 전부라 착각할 텐데도 말이다. 부모들이 모두 현명했다면 실수도 없어야 하고 어긋나가는 자녀들도 나타나선 안된다. 과연 그러한가?
개구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깊은 우물 벽을 타고 그 끝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우매함을 자각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듯 부모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아프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삶에 찌들어 변화를 갈망할 생각조차 못하는 부모란 존재들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첫 마중물이 부모란 존재다."
엄마 뱃속에서 꼬물꼬물 자라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맞아주는 이가 부모다. 자신밖에 모르다가 낯선 이를 만났고 그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통해 성장한다. 양육의 질과 깊이가 발생하는 시점이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표정을 읽고 말을 배워간다. 감정이 형성되고 지적 발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얼마나 안정적 감정을 제공하고 양질의 지적 자극을 제시하냐에 따라 내적 성장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씨앗을 뿌린다 해서 싹이 트지 않는다. 적정한 온도, 습도, 햇볕이 있을 때 건강하게 자라기 마련이다. 아이도 여린 씨앗과 다르지 않다. 물리적인 것들이야 따라 할 수 있을 테지만 비가시적인 감정은 특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사는데 바빠서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핑계를 대고 싶다면 거꾸로 묻고 싶다. 당신들 손에 쥐어진 핸드폰 검색, 주변에 널려있는 PC로 단 한 번이라도 양육이나 육아에 대한 검증된 자료를 찾아 정독한 적이 있는지를 말이다. 게임 & SNS & 웹서핑에 투자한 시간 대비 과연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얼마의 시간을 할애했는가 말이다. 비율이 9:1이라도 있을까?
부모 자신이 받아온 양육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들은 풍문으로 대강대강 키우는 일들은 정말 비일비재하다. 이런 작태로 인해 아이들은 점차 묘한 방향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부모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과 기분 내키는 대로 지껄이는 언행들에 아이들은 상처받고 멍들어간다.
[자신의 아이에게 고칠 점이 많다며 훈계하자 아이가 부모에게 불만이나 문제점은 자신을 만든 제조사에 항의하라!]는 짧은 영상을 보았다. 그 아이는 정곡을 찔러버렸다.
"이쁨을 받아본 아이가 이쁘듯 사랑도 받아본 아이가 사랑스럽다."
'왜 자기는 이뻐해 주지 않냐!'며 한 아이가 대놓고 교사인 내게 말했다. 차별로 보였나 보다. 내가 아이에게 다가기지 않고 늘 아이들이 내가 앉아있는 교탁 주위로 다가온다. 해서 누군가를 내가 특별하게 더 자주 가까이하지는 않는다. 어떤 맥락에서 아이는 내게 이런 불만을 표출했을까 살폈다. 그 아이가 말한 것은 물리적 거리나 접촉 빈도가 아니었다.
내가 그 러블리한 아이를 대하는 느낌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말을 자주 하기에 그 아이를 바라보는 내 눈은 이미 미소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우니 표정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녀석은 부모로부터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구나 싶다. 표정에서부터 행동까지 흠씬 묻어난다. 그 아이의 러블리한 매력은 부모의 양육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했다.
아이들은 사랑받는 법을 모른다. 태어난 직후부터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밝고 건강한 사랑이 부모로부터 아이에게로 전달되어 아이 몸에 스며드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우라는 아이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에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건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야 할 보이지 않는 소중한 유산이다. 부모가 변치 않는 한 절대 소유하지 못하고 결핍될 부분이다.
초등학교 1학년은 부모로부터 전달받은 사회성과 매력을 발산하는 첫 무대이지 준비하는 시작이 아닌 것이다. 아이의 사회생활은 생후직후부터 이미 가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까지 8년의 간극은 그 누구도 좁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