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면 왜 그랬을까 싶다.
뭐에 홀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내가 미쳤던 게 분명하다.
아이들 가정사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어른도 개인마다 지금까지 흘러온 서사가 있듯이 아이들도 짧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분명한 과정이 있다. 잘 자라는 녀석들은 궁금해하지 않아도 알아서 떠들어대니 짐작이 간다. 문제는 엇나가는 녀석들은 꽁꽁 감추고 숨기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 녀석들에게 개인사는 아픈 곳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주말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는 녀석을 수소문해서 집에 데려가고 그 집에서 양육자와 한참 이야기를
했던 때가 있긴 했다.
지금은 가정사를 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을 흐트러 뜨릴 수 있다. 문제를 조금이라도 막아주려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더는 학생들의 개인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끼니를 잘 챙기는 여건인지 알려하지 않는다. 패스트푸드로 저녁을 해결하고 먹다 남은 것을 다시 아침으로 먹는 녀석을 위해 1년간 아침 도시락 셔틀을 했었다. 직접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를 해서 건네기 위해 아침잠 30분을 포기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아서 멈춘 것은 아니다.
자칫 음식에 문제라도 생기는 날에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땐 운 좋게 무탈히 넘어갔으나 앞으로도 그러리라 장담할 수 없다. 선의가 악의로 변질되는 것이 한순간인 작금의 시대다. 아이들이 무엇을 먹고 다니는지 절대 듣고 싶지 않다.
아이들의 복장에 개입하지 않는다.
옷이 과하면 말렸고 부실하면 같이 가서 사주기도 했었다. 귀찮고 아까워서 멈춘 것은 아니었다. 배꼽 티와 민나시, 초미니 스커트, 풀메이크업까지 이건 양육자가 허용한 것이기에 말리는 일은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했다. 절대 막을 수 없다. 새 옷을 사 입히는 것은 타 아이들로부터 차별 소리를 듣게 했다. 모두 사주는 게 아니라면 명백한 차별이란 게 그 아이들의 논리였다. 배려가 없는 이들로 인해 멈춰야 했다.
계절에 맞지 않은 옷을 입는다 해도 이제는 보고 싶지 않다.
더 배웠으면 싶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조금 더 하면 향상되는 게 공부이긴 하다. 문제는 배우는 위치에 있는 아이들이 하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으면 가르치려는 욕심은 분란으로 이어진다. 확인하고 필요한 숙제를 준 뒤 검사하는 일들을 했었다. 집에서 밤잠을 늦춰 가면서까지 확인하고 준비할 때도 있었다. 열심히 가르치기는 하나 잘 배웠는지는 확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시대 학교의 모습이다. 현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절대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가르치라한 그것만 충실히 전달하는 것으로 주어진 소임만 다하여한다.
미친놈마냥 오지랖질은 더 이상 안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