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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eajigi Feb 15. 2024

초심의 변질

교만 or 상처


 누구나 새로운 일 또는 사람과 직면하면 초심이란 것을 품기 마련이다. 등에 비수를 꽂거나 사기를 치겠다고 작정한 이가 아닌 이상 초심은 대부분 긍정적이거나 이상적인 상태를 꿈꾼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심은 옅어진다. 익숙함에서 묻어온 매너리즘이 원인일 때도 있다. 크고 작은 성처들이 쌓이고 쌓여 본래 먹었던 마음에 생채기를 남겨 살고자 하는 본능에 바뀌기도 한다.


 아름답고 낭만적 기대가 사라진 자리는 냉소와 방임이 차지한다. 풋풋한 생기가 자취를 감추고 조화 같은 그럴싸한 딱딱함만 남아 있다.


"왜 저렇게 무미건조할까?"

 사회 초년생들이 닳고 닳은 기성세대를 바라볼 때 내색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느끼는 감정을 나 역시 초짜 시절에 짙게 받았다.

 지금 갓 입문한 이들이 나를 바라볼 때 느끼는 것도 예전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러고 싶어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기대한 방향으로 세상은 흘러가지 않는다. 멋모름과 오만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나만의 희망회로임을 젊은 혈기가 있었을 땐 몰랐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커지기 마련이다. 자잘한 좌절이 상처가 되어 돌아오기에 타격감은 누적되어 상당하다. 단련되면 좋으련만 인간은 철이 아니다. 상처만 깊어질 뿐이다. 마음에 쌓인 상처가 스스로의 몸을 해하고 결국은 무너진다.


"초심이 너무 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루어냄을 의심하란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이른 시간에 달성되거나 한 번에 끝나리란 낭만적 환상에 빠지지는 않았으면 싶다.

 내가 가려는 길에 수많은 변수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대책이나 대비는 발생할 사건의 경우의 수가 예측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전혀 사전 준비를 할 수 없다. 담담하게 순응하는 것은 사태에 직면할 그 시기에는 불가능하다. 충격이 사그라들 만큼의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인정하게 한다.


"초심은 누구나 잃는다."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만일 자신이 수십 년간 초심을 유지한다 생각하면 이는 둘 중의 하나이다. 초심을 기억하지 못하던지 아니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스스로의 기억을 체계적으로 변조하던지.

 초심을 잃어가는 것은 나만의 문제도 아니고 누군가의 탓도 아니다. 그만큼 열정을 갖고 하얗게 불태웠다는 반증이다. 언제까지 빨간 열기를 내뿜으며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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