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에 목숨 걸듯 난리를 치는 병자들이 늘어간다. 혼자 열을 낸다.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일에 말이다. 심지어 화를 내놓고 스스로 당했다 코스프레를 하던지 이겼다 자랑질을 한다. 그런 부류들이 말하는 사안이 그리 분노할 일인지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분노조절에 장애가 있는 것들은 환희와 분노를 넘나드는 기분변화를 보인다. 널뛰기를 하는 감정 파고는 주위 사람을 불안하게 함에도 정작 당사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작태가 가능한 이유는 절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감정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존감이 높은 것도 아니다. 사사건건 시비가 붙는 이유는 언제나 무시당했다는 자격지심에서 기인한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함이 허접한 양육환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개인적 모자람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기도 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분노조절에 문제가 있는 이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를 알아야 할 까닭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처한 환경이 어떻고에 대한 이해는 더욱 거부한다. 이런 병자들의 행적이 옳지 못한 행동에 당위성이나 측은지심을 더하여 희석시킴은 오히려 문제를 키울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화통을 삶아드신 이런 것들로 인해 수많은 이가 이유도 모른 채 피해를 입었고 입고 있다. 분노조절에 문제가 있는 이들은 직장이나 사회로부터 철저한 격리가 필요함에도 그러지 못한다. 개난리를 치는 부류들이 기고만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합당한 응징과 완벽한 분리가 건강한 사회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나 현길은 대비책도 없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문제 있는 부류들을 멀리하는 것이다. 무리에서 배제시킬 권한은 없기에 외면이란 소극적 보호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본노조절에 문제가 있는 병자들은 이를 차별이나 무시라 말할 테지만 말이다. 이런 것들이 피해자처럼 오판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일말의 자기반성이란 게 애당초 없기에 가능하다. 해서 정상범주의 사람이라면 이런 부류들과 접점이란 불편하며 만나거나 연결될 개연성을 애초에 차단한다.
사람 탈을 쓴 미친개와 한 공간에서 공존하고픈 이들은 없을 것이다. 버럭버럭 성질냄이 일상이라면 스스로의 말로가 고독 밖에 없음을 알았으면 싶다. 당장의 달라짐은 없을 것이 분명하지만, 죽기 직전이라도 살아온 삶을 단 한번이라도 반성할 척도는 생길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