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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시대 10

순응과 착함

by Aheajigi


우린 어릴 적부터 순응을 강요받는다.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배꼽 인사부터 배운다. 늘 착하게 살라 친절한 압박도 함께 말이다.


순응은 하달식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한다. 시키는 것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란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외압까지도 말이다. 예쓰맨은 순응을 조금 더 현대적으로 포장한 것이다. 그리고 지시하는 것들에게는 칭찬을 해주라 한다. 다들 알겠지만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것은 개소리다. 고래는 사육사가 들고 있는 생선을 먹기 위해 눈치를 보고 움직일 뿐이다. 사육하는 동물처럼 사람을 다루는 일이 발생한다.


착함은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지 않도록 한다.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서도 안되기에 언행에 신중하도록 만든다. 속내를 감춰야 하며 늘 미소 띤 얼굴로 생활해야 착하단 소리를 듣는다. 웨딩 앨범 촬영이 난 너무 힘들었다. 쉴 새 없이 스마일을 외치는 사진사 덕에 난 볼에서 경련이 일었다. 속으로는 이게 뭣하는 짓거린가 부글부글 끓었으나 생에 한 번인 결혼사진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웃고 또 웃었다.


우린 누구를 위해 순응하고 착해야 하는 것일까?

순응과 착함의 최대 수혜자는 안타깝게도 내가 아니다. 순응과 착함이 결국 돌아온다지만, 과연 그럴까? 순응이 주는 결괏값은 강요한 자들만 누린다. 착함 또한 주변인만 행복회로를 돌릴 뿐이다. 주관이란 게 없다면 문제가 없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속내까지 겉과 같을 수는 없다.


순응과 착함에 모두 만족하다면 술담배가 이리 잘 팔릴 까닭이 없다. 고성과 샤우팅이 흔할 리 만무하다. 쌓인 욕구들이 불만으로 표출됨은 이상하다.


할 말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포지션은 목적에 따른 효율성 때문에 만든 것이지 신분제처럼 우위를 가리기 위함은 아니다. 지금 바뀌지 않는다면 곪고 곪은 끝에 엄청난 반전이 도사릴 수 있음을 명심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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