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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여린 약자에게 더 가혹했다.(5)

해도 또 해도 줄지 않는 일거리

by Aheajigi


아무 생각 없이 걸었거늘 발길은 자연스레 암울한 숙소로 이끌다니 탄이는 쓴웃음만 나왔다. 힘 빠진 걸음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목사가 마당에서 팔짱을 끼고 째려보았다. 고개를 꾸뻑 숙이고 지하로 들어가려는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궁이 이어졌다.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기에 집으로 이상한 전화가 오게 만들어?”

피구 사건이 아마도 이곳으로 전달된 모양이지 싶었다. 탄이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목사 가족과 교회 얼굴에 먹칠했다는 생소한 죄목이 갑작스레 만들어졌다. 스스로를 목사라 부르라는 그는 탄이에게 매일 교회 청소를 하라는 뜬금없는 벌칙을 내렸다.


“구원님! 마침 계셨네요.”

“탄이도 반가워!”

신도들 몇몇이 마당으로 들어오며 목사와 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금 전까지 탄이를 잡아먹을 듯이 매서운 기세로 째려보며 소리치던 목사의 맹수 같은 모습이 감쪽같이 감춰지고 가식적인 접대용 웃음이 목사 얼굴에 만발했다. 이때다 싶어 탄이도 몇몇 어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


이것으로 사건이 넘어가나 판단한건 탄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이 가족이 어떤 모의를 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날을 기점으로 숙소에서 탄이가 해야 할 일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불과 며칠 만에 목사 부부는 집안일 대부분을 탄이에게 시켰다. 이를 지켜본 그들의 자녀 현이까지 자신의 소소한 일을 떠넘겼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탄이는 잠깐 엉덩이를 붙이고 쉴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기껏 힘들게 무언가 해놓으면 이들의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시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매일매일 늦은 밤까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일에 탄이는 빠르게 지쳐갔다.


이불빨래를 마당에 널다가 파김치가 된 탄이가 끙끙거리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는 붉은색 그러데이션을 하늘에 남겼다. 하늘과 이웃한 산자락은 울긋불긋 단풍이 화려하게 물들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가을 끝자락을 한껏 얄밉게도 뽐냈다. 문득 할매가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삶은 사계절이여.’

‘사는데 그런 게 어디 있데요?’

‘아녀. 살아가는 것도 봄∙여름∙가을∙겨울처럼 다른겨.’

‘나이가 드는 것 밖에는 모르겠는디?“

‘그냥 늙는게 아니라 파릇파릇에서 푸릇푸릇으로 그리고 알록달록에서 냉랭한 시원함까지 있는겨!’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탄이는 할매와 함께 지냈던 때가 화창한 봄날인 듯싶었다. 돌아가신 할매의 말을 빗대자면 탄이의 현재 삶은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 분명했다. 혹한의 끝도 알 수 없고 도망가거나 피할 곳도 없는 냉랭함만 있으며 희망적인 빛줄기 한줄 비치지 않으니 여기는 계절에서 벗어난 지옥이 분명했다. 할매가 없는 세상은 탄이에게 절대로 따스한 여름이나 화려한 가을을 내어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해야 할 일이 한참 남았는데 거기서 뭐해!”

목사의 호통에 힘겹게 몸을 일으킨 탄이가 잡초가 무릎 높이까지 자란 뒷마당으로 향했다. 갈수록 육중한 무게감을 더해가는 가사 노동은 탄이를 젖은 수건 쥐어짜듯 억세게 비틀어댔다. 결국 독사 같은 목사 가족의 부려 먹기에서 벗어나려 등굣길은 서둘렀고, 하굣길은 최대한 뭉그적거리며 돌아가는 시간을 늦췄다. 그나마 학교는 목사 가족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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