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유혹 그리고 거짓말
푸르스름한 수국꽃과 불그스름한 이름 모를 꽃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계절에 접어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좁다란 골목길에 접어들 때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가희가 쫓아오며 소율이를 멈춰 세웠다.
“하악! 하악! 한참 불렀잖아!”
“미안, 딴생각하느라 듣지 못했어.”
소율이는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며 가희와 대화를 이어갔다.
“너 내일 뭐 해?”
그렇게 친하지도 그렇다고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도 아닌 데면데면한 관계였는데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오니 소율이는 살짝 긴장했다.
“음, 별일이…….”
우물쭈물하자 가희가 소율이 말을 가로챘다.
“내일 내 생일파티 올래?”
가희가 내민 봉투를 보았다. 검은색 볼펜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지운 흔적이 있었다. 아마도 본래 초대하려 했던 친구가 소율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짐작했다. 꿩 대신 닭이 되었음이 분명했지만, 속으로 날아갈 듯이 너무 기뻤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친구들로부터 생일파티에 초대받아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내 단짝으로 지내는 영아까지도 이제껏 소율이에게 생일파티 초대장을 내민 일은 없었다.
“응. 알았어.”
소율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가희는 손바닥만 한 봉투를 건넸다. 생일 카드를 열어보니 손 글씨로 날짜와 시간, 장소가 적혀 있었다. 생일파티에 꼭 가겠다고 말하려 고개를 들자 가희는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소율이는 깃털같이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띠링, 띠링”
거실에서 누워 쉬고 있던 소율이는 데굴데굴 굴러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영아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내일 물때 맞춰서 만나기로 했잖아, 그리고 컵 떡볶이도 사 먹자!”
“그게……, 어……”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영아와의 약속이 그제야 떠올랐다. 당황한 소율이가 말을 얼버무리자 영아가 낌새를 알아채고 따지듯 물었다.
“너 내일 갯벌에서 해루질하자는 약속 잊었어?”
목소리 톤이 한껏 격양된 영아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민하던 소율이는 하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나도 오랜만에 맛조개 잡으려고 방사능측정기까지 준비했는데. 내일 엄마가 어디 간다고 준비하래. 무슨 일이 있나 봐.”
영아는 소율이의 말을 듣고 낙심한 듯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그럼 할 수 없네. 잘 갔다 오고 다음 주에 학교에서 보자.”
영아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께름칙했지만, 소율이는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수많은 별이 저마다 캄캄한 밤하늘에서 뽐내듯 반짝이던 밤, 침대에 누운 소율이는 눈을 감고 웃었다가 걱정했다가를 반복했다. 첫 생일파티 참석을 기다리는 싱숭생숭함과 단짝 영아와 약속을 깨버린 마음 한구석 찜찜함 때문이었다.
“여기 타세요.”
말끔한 정장 차림의 여자 어른이 마차에 올라타라며 안내했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소율이도 길고 화려한 드레스가 몸을 감쌌다. 소율이가 마차에 올라타자 말이 따각따각 경쾌한 소리를 내며 점점 속도를 올렸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서서히 캄캄했던 마차 창밖이 환하게 변했다. 휘황찬란한 등불이 언덕 너머 하나둘씩 나타났다. 소율이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다리 건너편 커다란 성이 보여다. 뾰족뾰족한 여러 개의 탑이 보였고 주황색 지붕 아래 번쩍번쩍 빛나는 대리석 건물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내밀었다.
“촤~악”
물줄기가 높게 솟아오르는 분수 앞에 마차는 멈췄다. 문이 열리자 울긋불긋한 꽃이 가득한 정원 사이로 펼쳐진 파란 양탄자가 눈에 들어왔다. 소율이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연이어 마차가 도착했고 내리는 사람들 모두 같은 길을 따랐다. 긴 드레스가 계속 신발 끝에 밟혀 소율이는 휘청거렸다. 하는 수 없이 양손으로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렸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 즈음 높다란 계단이 나타났다. 오르고 또 올랐지만, 끝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내심 궁금했지만, 소율이는 모르는 누군가에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망설이면서도 계단을 계속 올랐다. 가파른 계단 때문에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종아리는 단단하게 뭉쳤다. 잠깐 쉴까 생각하며 멈칫하는 순간 ‘가희의 생일파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소리가 고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생일파티 참석이 처음인데 늦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소율이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헐떡이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등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들 즈음이 되어서야 마지막 계단에 올랐다. 잔잔한 음악이 귓바퀴를 간질였고 군침을 돌게 하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예쁘게 펼쳐진 파티장 한가운데 화려하게 차려입은 가희가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축하 인사를 건네려 종종걸음으로 비탈길을 내려갔다. 웅크려 앉아 잠시 숨을 고르던 소율이가 다시 일어서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영아가 가희 뒤에서 나타나 팔짱을 끼고 서로를 마주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아와 떡볶이 먹기로 한 약속을 거짓말로 깨버렸는데, 어쩌지?’
소율이는 황급히 등을 돌려 파티장에서 달아나려 했다. 수많은 계단을 올라 후들거리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치렁치렁한 치마를 밟았고 일하시는 분과 부딪히며 크게 넘어졌다. 테이블이 쓰러졌고 놓여있던 음식들이 와르르 소율이를 뒤덮었다. 음료수는 얼굴을 흘러내렸고 드레스는 엎질러진 음식물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기어서라도 도망치려는 순간 영아가 앞을 가로막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여기 오더니, 꼴좋네!”
소율이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지만, 이제는 팔까지 꼼짝하지 않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네가 친구와 해루질 약속을 깬 그 뻔뻔한 거짓말쟁이였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소율이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난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에 소율이는 눈물만 흘릴 뿐 대꾸하지 못했다.
“잠꾸러기 딸! 소율! 일어나야지!”
‘꿈이었구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꿈은 깨끗하게 지워졌다.
‘잉! 주말인데……’
엄마가 쉬는 날 아침까지 깨운다고 생각하니 살짝 짜증이 났다. 발가락은 이미 춤을 추듯 꼼지락거렸지만, 보들보들한 이불 밖으로 나가기는 정말 싫었다.
“오늘 중요한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깜빡했다!”
소율이는 눈이 번쩍 뜨였다. 너무나 생생한 꿈 때문인지 깨어나서도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두덩이는 퉁퉁 부어있었다. 자기 전에 미리 골라둔 옷이 있었기에 부산떨지 않고 첫 생일파티에 갈 준비를 빠르고 깔끔하게 마칠 수 있었다. 아끼는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모습을 전신거울로 다시 확인했다. 들뜬 기분을 안고 가희 생일파티 장소인 키즈카페로 통통 뛰며 향했다. 10명 남짓한 낯선 친구들이 모이자 신나게 먹고 즐겁게 뛰어노는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소율이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묘하게 불편했다. 두 시간 남진 지날 무렵 가희가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소율이는 이제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다 예상하고 주섬주섬 휴대전화기와 작은 손가방을 챙겼다. 내내 영아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은 물때가 지나 해루질은 못 하겠지만, 지금이라도 단짝 친구 영아와 함께 놀면 조금이나마 불편한 마음을 덜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이제 디스코 팡팡 타고 노래방 갈까?”
가희의 말에 여러 친구도 신난다고 맞장구를 쳤다.
“신난다!”
“너무너무 좋아.”
늦게나마 영아와 놀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소율이는 쭈뼛거렸다. 가희와 친구들은 소율이가 밋밋한 반응을 보이자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그래.”
10명 남짓한 친구들의 눈빛에 앞도 된 소율이가 하는 수 없이 함께하기로 했다.
“스냅사진도 찍어야지!”
이제 끝났나 싶으면 또 다른 이벤트가 연이어 등장했다.
“마지막으로 노래방~”
친구들의 노래를 한 시간가량 듣고 나니 해는 산마루에 손톱만큼 보이며 불그스름한 여운만 남겼다.
월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영아와 소율이는 팔짱을 끼고 등굣길을 함께 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가희가 갑자기 앞을 가로막았다. 가희가 소율이 눈앞에 무엇인가를 흔들더니 소율이 손에 꼭 쥐여 주고 한마디를 남기며 뒤돌아 뛰어갔다.
“토요일에 같이 찍었던 사진이야!”
가희의 말을 들은 영아가 팔짱을 풀어버렸다.
“나랑 한 약속을 깬 이유가 가희랑 같이 노는 거였어?”
“그게…….”
“그럼 솔직하게 다른 약속이 있다고 말했어야지!”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실망이다.”
영아의 화난 얼굴을 본 소율이는 변명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영아의 서운함을 이해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영아는 소율이를 뒤로한 채 발을 쿵쾅거리며 교실로 들어갔다. 소율이가 다가가면 모른척하며 떨어지는 것을 빼면 영아는 다른 친구들과 온종일 즐겁게 떠들고 웃으며 언제나 그랬듯이 아주 잘 지내는 듯 보였다. 소율이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는 영아가 온종일 신경 쓰였다.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영아와 같은 교실에 있는 것이 몹시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를 고민하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소율이는 입었던 옷을 재빨리 낡은 세탁기에 넣고 또 “기억 빨래” 버튼을 또 눌렀다.
다음날 골목 모퉁이에서 영아가 달려왔다. 환하게 웃음을 머금은 영아의 표정과 어제 냉랭하기만 했던 영아의 얼굴이 겹쳐 보이자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소율이는 영아와 팔짱을 끼고 여느 때처럼 학교로 향했다. 몇 걸음 앞에 걸어가는 가희가 보였다.
“가희야 안녕!”
생일파티까지 초대해 주었던 것이 고마웠고 함께 놀았던 시간이 즐거웠기에 소율이가 가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나? 왜?”
하지만, 가희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
가희의 반응이 기대했던 예상과 달랐기에 소율이는 적잖이 듯 당황했다. 낡은 세탁기 사용으로 가희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웠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무슨 할 말 있어??
“아니, 그냥 지나가는 게 보여서.”
소율이는 대충 얼버무리며 이 상황을 은근슬쩍 넘어갔다.
‘친한 친구가 더 많아질 수도 있었는데.’
누군가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이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새 친구를 사귀는 일에 훼방을 놓는 씁쓸한 뒷맛을 남길 수도 있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래도 단짝인 영아랑 계속 같이 지내서 다행이야.’
소율이는 자신을 위로하면서 개운치 않은 기분을 대수롭지 않은 척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