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헤브 Jun 03. 2024

24화_먼 나라이웃나라_아프리카 편_세계시민_2

아프리카에 꼭 한 번 가 보세요

Republic of Kenya (케냐)

* 수도: 나이로비
* 언어: 스와힐리어, 영어 공용
* 동아프리카 공화국
* 인구 : 약 5200만 명
* 독립일 : 영국으로부터 1963년 12월 12일
* 면적 : 224,961 제곱마일, 혹은 582,646 Km2이며,
* 케냐는 마다가스카르 다음으로 세계에서 46위로 면적이 넓은 나라
* 종교 : 기독교 80%, 이슬람 10%, 기타 종교 10%


사랑하는 기쁨이 안녕 오늘은 사랑 이야기를 나누려 해  
아빠는 우리 기쁨이 위해 밤마다 기도할 때마다 너의 고통을 헤아리며 참 많이 울었던 것 같아
너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너를 품고 아파하는 네 엄마 마음이 느껴져서 더 많이 울게 되고, 그렇게 오래 기도하는 중에 너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병원 동생들을 놓고 또다시 울고, 그렇게 계속 기도는 한없이 길어져
어느 날은 기도하다 밤을 새울 것 같아, 주님께 잠이 오도록 도움을 요청한 적도 많았어
요새는 걸을 때 오는 통증 때문에 네 수술 일정을 깊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아 아빠 엄마 마음이 많이 아파
우리 기쁨이는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까
수술받는 거 너무 싫어하는 네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을 찾아볼게
사랑이란 참 오묘해. 사랑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단어이지만, 그 어느 것보다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거든. 오직 생명을 통해서만 말이야


아프리카 우간다 아이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사랑스런 아프리카 아이들 모든 아이들이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는 그 날이 오도록 모두가 노력해야지

기쁨아,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학교 수업에서 얼마나 들어봤을까? 아마 최소 1-2번쯤은 들어봤을 거야 우리에게는 미지의 나라들이지. 아프리카에 몇 나라가 있는지 우리 모두 한 번도 질문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TV프로그램에서 기아와 전쟁 등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나라로만 소개되어 왔지만, 대체로 그곳 사람들은 노래와 춤을 사랑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 아프리카에는 12억 넘는 인구와 현재 55개국이 있다는 U.N 보고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나라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해 저마다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걸 기쁨이도 알면 좋겠어  



우리와는 정서적, 물리적으로 너무 먼 나라 이야기여서 공감이 잘 안 되지?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가진, 피부색만 다른 같은 사람들이야. 언어가 3천 개 이상이 될 정도로 각 부족 언어 등이 다양하게 쓰이고 있지만 지역에 따라서 식민지 영향으로 영어를 쓰는 곳도 있고 프랑스어나 기타 유럽 언어를 쓰는 곳도 있다고 해. 한국 사람들은 휴가 시즌이 되면 유럽을 가거나 미국, 아시아를 방문하는 사람은 많지만 아프리카를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너무 더울 것 같고, 말라리아가 성행하는 나라, 에이즈가 창궐한 나라, 테러와 강도가 많아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등등.. 대신 사람들은 화려한 건물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이나, 드넓은 기회의 땅 미국을 선호하는 것 같아 



그런데 아프리카는 전 지구 지표면에 6%, 육지 면적으로만 보면 20%를 차지하는 매우 큰 대륙이야. 아시아 다음으로 큰 대륙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경제 성장 속도가 빠른 대륙이기도 해. 다양한 종교, 역사, 인종으로 어우러진 나라지. 아빠는 그중에서 인구수 기준으로 7번째로 큰 나라, 동아프리카 공화국 케냐에 단기간 체류했었어. 기간은 두 달뿐이었지만, 첫 번째 회사를 아프리카로 정하고, 국내 기업 일대다 면접을 거치고, 케냐 현지 실무자, 책임자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케냐라는 땅으로 모험을 떠난 거야.


자유와 모험과 열정을 가슴에 새기고, 아직 서른이 되기 전에 모험을 택하기로 선택한 거였어. 진짜 어른이 되고 싶었나 봐. 불도저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리고 그때 이미 네 엄마와 결혼 약속이 되어 있었단다. 엄마는 아빠가 떠나 아프리카 케냐에 잘 정착을 하고 나면, 현지에서 한 번 결혼식을 치르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한국식 결혼식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아빠는 케냐라는 나라를 가자마자 주위 흑인 동료들 도움을 받아 나이로비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국립공원 근처 야외 결혼식장도 알아보았단다.


사바나 내 사파리에서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해 줄 수 없을까? 야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하면 아내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키마리!
 

이 주제를 놓고 흑인 동료 몇 명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눴어. 참 고맙고 행복한 시절이었지. 현지 동료들이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내 결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으니까.



아빠가 현지에 도착했을 때 해는 뜨거웠는데, 초 저녁이 되니 날씨가 금방 서늘해졌어. 케냐 나이로비 수도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고, 7월 평균 기온은 최고 20도 최저 10 도 정도여서, 아빠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서늘한 환경이었어. 나이로비라는 수도 자체가 해발 1,795m에 위치해 있었고, 인구는 4백만 명이 넘을 정도의 큰 규모 대도시였어.



2010년 이전이었는데 나이로비에는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대형 고층빌딩과 패셔너블한 케냐 아가씨들, 일반 도로 위에는 도요타 차량들로 가득했고, 종종 현대 자동차도 볼 수 있었어. 수도에는 U.N 아프리카 나이로비 사무국이 있어서 가끔씩 U.N 마크가 달린 하얀색 험비(지프) 차량도 볼 수 있었어. 흥미진진한 나라였어. 부와 가난이 공존한 사회는 지구상 어디에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아프리카에서 부와 빈의 차이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했던 것 같아.



치장을 좋아하는 여성들, 화려한 각종 장신구를 몸에 달고 다니는 여성들을 많이 보았고, 반대로 어느 좁은 골목 길거리에 앙상하게 말라죽어 있던 여성도 보았어. 아빠는 그 두 광경이 자꾸만 대비되어 생각이 나서 많은 시간 깊은 생각 속에 잠겼었어. 고지대 특성상 산소가 부족해서인지 외지인이었던 아빠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코피를 왕창 쏟아서 휴지를 한 움큼 써야만 했고,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코피를 흘리다 몸이 적응을 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코피가 쏟아지지 않기 시작했어. 이유가 걱정돼서 물어보니 워낙 고지대라 몸이 적응을 하는 과정이라 그런 거라고 누군가 알려줬었어



당시 동네를 걸어 다니는 어린이들은 말할 것 없이 한국 또래에 비해 키가 작고, 얼굴엔 짙은 슬픔이 서려 있었어. 물론 내가 본 아이들이 그랬다는 거야. 그곳에서 함께 일했던 한국 사람 몇 명을 제외하면 아빠 인생 첫 동료들은 주로 케냐인이었고 소수의 인도인, 파키스탄 사람으로 구성되었어. 평상시에 영어로 대화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는데 세탁기 마케팅, 영업 담당자로 입사해서 케냐 홈디포(하이마트와 비슷) 마켓에 영어를 써가며 세탁기 물량을 공급하는 계약 협상을 하고, 한 해에 얼마를 팔건지 논의하고, 본사에서 하달된 영업 목표를 가지고 전략 계획 수립을 하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 동시에 흥미로웠어



흑인 동료들이 참 좋았어. 흑인들이랑 마음이 잘 통했거든. 아빠가 흥이 많잖아~ 그분들은 아빠보다 적어도 2배 이상 흥이 많은 흥부자였어 거기서 흥을 더 많이 가지고 한국에 나중에 귀국하게 되었지. 그래서 너도 아빠만큼 흥이 많은 거야. 매일 그 흥을 보여주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흥이 분출할 때면 가끔씩은 나 때문이다 생각하고 있어


사파리 가는 중에 흑인 동료와 한 컷

특히 케냐인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그 친구들은 내게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해줬어. 어느 날 강도를 만났는데, 돈을 뺐더니 차에서 내리라고 하더래. 그래서 뭔가 하고 내렸더니 본인 차를 타고 가버리더래. 어느 친구는 트렁크에 감금을 당했다가 어디에 버려지고 차만 가지고 간 적도 있었다고 했고, 당시에는 경찰 중에도 부패한 사람들이 꽤 많아서, 낮에는 경찰 일을, 밤에는 총을 가진 강도가 되어 활개치고 다니는 사람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들었어. 무서웠어. 그런 일을 당하면 도움을 받을 곳이 마땅치 않아 보였거든.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거의 다 사륜 구동(어떠한 상황에서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튼튼한 지프 차량)을 주로 타고 있었고 나도 오래 있을 거면 중고차를 구매하는 편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한 번은 한국인들과 사륜 구동차를 타고 어딘가 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웬 경찰관이 운전 법규를 위반한 일이 없음에도 우리 차량을 한쪽에 세우는 거야. 그러더니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모습도 봤어. 그곳을 통과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의례적으로 돈을 얼마 주어야 통과시켜 준다고 차를 사게 되면 현금을 늘 들고 다니라고 충고를 들었던 기억이 나. 법과 질서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사회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한 셈이었지. 벌써 15년 전이라 지금은 조금은 나아졌겠지. 제발 그렇기를 바라~



기쁨아 이제부터 잠시 눈을 감고 아빠와 함께 그 시절로 함께 떠나는 상상을 하는 거야.

아빠가 소상히 길을 안내해 줄게. 언젠가 너와 내가 다시 케냐 땅을 밟은 그날, 아빠가 너를 안전하게 데리고 다닐 수 있도록 아빠는 앞으로 더 많은 걸 준비할 거야 그 길로 너를 새롭게 안내할 때까지


자 이제 타임머신 출발한다




흑인 동료들은 케냐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한마디 말을 듣더니, 이곳저곳을 제안했다. 굉장히 아름다운 결혼식장이 있다고도 했고, 주위 동료들과 너희 부부만 참석하면 되는 것이니 재정적으로 너무 큰 부담을 안 가져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에 중국 여성들 실종 사건들이 자주 보고 되고 있었다. 대사관을 통해 한국 여성들도 안전에 주의하라는 통지가 여러 번 들려왔다. 아내가 이곳에 오면 안전할까? 많은 걱정이 되었던 게 사실이었다. 영어 발음도 달라서 알아듣기도 힘들고, 한국 사람들이 중고차를 구매해서 다니긴 하지만, 특정 지역으로 가면 괴한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다는 충고도 들었기에 계속 망설여졌다. 내가 솔로였다면 아마 10년은 살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나라, 사람들, 처음 보는 광경들, 저녁이면 퇴근하며 뛰어서 집에 가는 마라톤 열정 가득한 케냐 사람들에게 마음을 뺏겼다.



깊이 고민했다. 최소 몇 년은 있을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물론 다른 이유도 몇 가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케냐 땅을 떠나게 된 이유는 예비 신부의 안전을 그 누구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게 큰 이유를 차지했다. 그녀 손 끝이라도 다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침에 상사들과 출근을 같이 할 때도 있었고 마타투(음향 기기를 잔뜩 달고 다니는 비행기 급으로 시끄러운 봉고차)를 타고 출근한 적도 있었다. 낮에는 회사 일을 하고 저녁 6-7시쯤이 되면 퇴근을 해서 내가 사는 지역에 내려주었다. 선교사님 댁에 거주하면서 하숙을 했고 너무 감사하게도 그 선교사님께서 레스토랑을 경영한 경험이 있으셔서 매일 먹는 음식이 한국 레스토랑 저리 가라 할 만큼 입맛에 맞았다. 선교사님 두 분과 자녀들과 함께 살면서, 방 한 칸을 내어 주시고 거주비, 생활 유지비를 드리면서 하숙을 하는 경험은 참 소중한 경험이 되었고, 선교사님이 일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갖고 살아가시는지, 무엇이 그분들의 마음을 어렵게 할 수 있는지, 실제적으로 그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떻게 일을 해결해 가시는지 직접 보고, 듣고, 질문을 드리기도 했었다.



15년 가까이 지나 우리 교회에 새로 연결된 케냐 선교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하숙을 하던 그 선교사님들과 친한 관계라고 하셨고, 15년이 지난 내 얼굴을 사진으로 보시고는 이 청년 여전하네. 크게 늙지 않고 얼굴이 여전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도 있었다


맨 앞이 선교사님 그 뒤를 이은 사랑스런 아이들


선교사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언어와 문화, 종교, 라이프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떠나, 몇 년이든 자신의 삶을 바쳐 그 나라의 교육, 문화, 가정, 사회 가운데 기독교 신앙 전파를 위해 애쓰시는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존경할 수 있는 계기가 거기에서 마련되었다. 지금도 또렷한 기억이 나는 게 뭐냐 하면 언니 동생으로 이뤄진 그 두 선교사님 중 한 분과 케냐 일상에 대한 이야기, 선교사들의 실제적인 삶, 케냐에서도 일정 시간 차를 타고 들어가 마사이족과 같은 부족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 스토리를 듣는 시간은 새롭고 귀에 솔깃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더욱이 재밌던 사실은 한인 교회를 다니는 동안 다음과 같은 형태로 교회 인원이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교하는 분도 목사님 선교사님, 성도들 50% 이상이 선교사님들, 나머지 일부만 비즈니스 사유로 사업을 하거나 케냐로 건너온 주재원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선교사님이 선교사님에게 "안녕하세요 선교사님 한 주 잘 보내셨지요" 하는데, 또다시 답변도 " 네 선교사님"이라는 대화가 매주 이어진다는 게 무척 생경한 경험이었다.



부족할 것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자기가 배운 학식과 경험을 뒤로하고,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가서 다시 언어를 배우고 그들 중에 한 사람 소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시간을 거쳐 그 지역 주민과 같은 마음을 가지는 법을 배워 간다는 사실이 참 숭고했다. 그 지역 사회를 든든히 세워 더욱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려는 숭고한 목적으로 그 나라에 정착을 한 분들, 그 선택을 하면서 교회나 단체, 개인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는 일정 후원금을 받아가며 적은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사역을 해야 하는 선교사님들 심정을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되었다.



세탁기 매니저가 되어 그해 영업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첫 번째 커다란 도전과 케냐 사람들과 마음과 마음을 나눠 진정한 의미의 동료가 되는 것, 그곳에 있는 동안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 가능한 한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 이 세 가지가 내게 있어서는 중요한 목표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가진 능력 하에서 열심을 내려고 노력했고, 부족한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에 남았다.




세탁기 판매 담당으로서 우리나라 기업으로 설명하면 하이마트와 같은 업체를 자주 방문했다. 케냐 상권은 주로 인도사람들이 잡고 있었는데, 역시 그곳 전자 유통 업계도 마찬가지였다. 인도 사람들이 식민지 시대 전후로 건너와 일찍 터전을 잡고 케냐 사회 여기저기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 보였다. 만나는 매니저마다 인도 사람이었고, 직원들이 주로 케냐 사람들이었던 걸 봐서 인도인들이 그 사회 내에 상당한 지위와 부를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케냐 세탁기 대리점 한 곳에 어떤 케냐 여직원이 있었는데, 그 직원이 갈 때마다 내게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 여자친구가 있느냐? 사귄 지 오래되었느냐? 얼마 되었느냐? 혹시 지금 외롭지는 않으냐? 나와 한 번 만나보는 것은 어떠냐? 분명 애인이 한국에 있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말했는데, 여기 있는 동안 나랑 잠시 만나보는 걸 그 여자가 어떻게 아냐고 말했다. 생겨나 처음 만난 유형의 사람이었고, 흑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흑인 여성이 나한테 관심을 가질 줄이야. 왜? 도대체 왜였지?



내 또래 여성이었지만 그녀가 무서워서 나는 그 매장을 더 이상 가지 않으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는 무서웠다. 한국 가기 전까지 외로우니 나랑 사귀자 하는데, 이 모든 걸 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상황도 그렇고, 그 대상이 케냐 여성이라는 것도 내겐 모두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때는 그곳에 가서 영업 판매 상태를 확인하러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 여성을 피해서 다른 매니저를 통해 일을 할 수 있을까 실제적으로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주말에는 사파리 공원을 다녔다. 물론 차가 없어 흑인 동료들이 나를 데리고 자기 시간과 비용을 대어 가면서 케냐 나이로비 근처에 유명한 국립공원을 데리고 다녔다. 두 달 동안 3번 정도 갔으니 자주 간 셈이다. 분명히 동물의 왕국에서는 사자도 있고, 버펄로 비슷한 커다란 큰 물소도 있었던 것 같고, 하마도 봤던 것 같은데, 그곳에는 얼룩말만 즐비했다. 아주 가끔 목이 길어 슬픈 기린 정도만 보였고, 사자는커녕 하이에나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이곳 사이즈가 한국으로 치면 예를 들어 경기도(道) 만큼 크다고 보면 된다 했다. 더구나 날씨는 덥고 대낮에 동물들이 돌아다니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했다. 몇 번 갔고 한참을 차로 수색작업을 하고 다녔지만, 결국 얼룩말 무리와 기린을 보는 것으로 사파리 여행은 끝이 났다.



한국으로 귀국이 결정된 이후, 마음이 착잡했다. 몇 년 있으면서 휴가 때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홀로 여행 다닐 생각이었는데, 그만두기 전에 두바이 출장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한국 땅으로 가서 또 재취업 준비를 할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흑인들과도 소통이 잘 되고, 인도, 파키스탄 사람들과도 이제 친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는데, 두 달 만에 한국에 돌아가야 하다니.. 복잡한 상황까지 겹쳐서 마음이 어려웠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 케냐 간다고 환송회를 거하게 해 줬는데, 두 달 만에 가서 뭐라고 하지? 이런 생각도 문득 들었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잠 5:21)



흑인 동료들과 석별의 정을 나눴다. 흑인동료들은 모두 다 나를 좋아했는데, 그중에 키마리라는 동료와 각별했다. 이 친구와 어떤 프로젝트를 맡아 같이 일을 하기도 했고, 상사들의 말에 따르면 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이니 거리를 적당히 두고 알고 지내라는 조언도 들은 바가 있던 동료였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늘 그를 대했으며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농담도 좋아하고, 그도 나를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내가 경쟁 대상의 위치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 역시 나처럼 누구를 모질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키마리가 우리 둘이 마지막 식사를 하자 말을 건네왔다. 저녁 식사를 먹게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둔 것 같았다. 그렇게 그와 단 둘이 마지막 환송회를 했다. 키마리는 그동안 두 달 밖에 안 되었지만 정이 많이 들었다 말해주었다. 나도 그렇다 했다. 나보다 형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슬하에 자녀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는 정말 성실한 직원이었고 칭찬받을만한 사람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그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렇게 2시간 정도 저녁을 함께 먹고, 그와 마음을 깊게 나눴다. 그는 나의 장점과 인간적인 모습이 너무 좋다고 했고, 네가 오래오래 함께 동료로 있기를 바랐다고 말해주었다.



그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이제 가면 다시 못 보는데, 너무 보고 싶을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우니 나도 눈물이 나왔다. 키마리의 얼굴은 지금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만큼 선명하게 남았다. 흑인들도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그렇겠지만, 내가 봐도 흑인들은 키 차이가 없다고 했을 때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던 것 같다. 그러나 키마리와 나는 각별한 관계였고, 나는 그에게 비즈니스맨으로서 여러 좋은 면을 배웠다. 아프리카에 가서 얻은 가장 소중한 기억을 불러오라고 하면, 애초에 이렇게 소중한 흑인 동료 몇을 만난 것과, 아내와 결혼할 장소를 물색하며 다녔다는 것, 그리고 선교사님 가족 분들과 짧지만 그분 차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교제할 수 있었다는 것 이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만난 흑인 동료들은 따뜻했다.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고, 자기 차량 경비 들여 가면서 주말마다 사파리 공원을 투어 시켜 주었다. 한국에서 받아 보기 힘든 직장 내에 환대였다. 그 진실함, 행함으로 보여주는 사랑 덕분에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케냐 땅을 그리워한다. 기쁨 이가 몇 년 더 자라고, 걸을 때 통증이 없는 그때가 되면 아이를 데리고 그 땅을 직접 밟을 것이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다른 곳으로 이전을 했지만 어쨌거나 방법을 찾아보고, 키마리와 재회할 날을 꿈꾸며 기도로 준비해야겠다.



다음번엔 내가 그를 대접해야지. 그때는 내가 그를 꼭 안아주어야지.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틀어 모든 인종을 다 만나게 해 주신 것 같다. 가깝게는 일본, 중국,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인도, 파키스탄 중동 사람들 조금 멀게는 미국, 남미, 유럽 사람들, 더 멀게는 아프리카까지 짧게 경험하게 하셨으니 고등학교 때부터 세계 시민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던 그 기도제목이 모두 응답되고 있다. 이제는 기쁨이에게 그 기쁨을 모두 전해줄 시간을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다. 언어를 다쳤지만 그 언어를 누구보다 잘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하여 지원할 것이다. 그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모두가 놀라는 날이 올 때까지!


외국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마음이 기쁘다. 다른 생김새, 언어, 문화, 풍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역시 일상을 살아가며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 아파하고 그리워한다. 우리와 다를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 우리가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가 없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이라는 걸 배웠다. 세계 곳곳에 전쟁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경제 논리로, 약소국 안에서는 부족 간 권력 다툼으로 존중하고 격려받고,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칼날을 곧추 세우고, 가엾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 언제든 전쟁이 다시 발발할 수 있는 나라, 풍요 속에 어느 날 어떤 일이 닥쳐올지 아무도 모르는 나라다. 6.25 전쟁의 참혹한 역사와 그 결과를 자료로 확인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먼저 깨움으로써 향후 통일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고민하며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면 그 땅에 모든 갈등과 싸움은 일 순간에 사라질 텐데,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배우고 실행에 옮긴다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해 상대방을 몰아세우고 적대시하는 풍토는 얼마 가지 못해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아프리카 케냐 두 달간의 짧은 인생을 통해 많은 가치를 배웠다. 매일 아침 아주 오래된, 정말 언제고 도로에 멈춰 서도 이상하지 않을 마타투(봉고차)를 타고 다니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귀청이 찢어져라 최대치로 올린 볼륨 소리 아래서 땀으로 흠뻑 젖은 케냐 남자들과 부대끼면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들은 아침 출근을 하러 도로에 나와 있는 나를 보며 동물원 원숭이처럼 세밀하게 관찰하고, 자주 볼 수 없는 동아시아 사람에 대한 호감 내지는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을 걸어왔다. 그리고 가능한 만큼 나는 친절하게 그들에게 대답을 건넸다. 매일 아침 케냐 일간 신문을 읽으며 몇날 며칠 동안 무수히 반복적으로 그 상황을 만났다.


그렇다. 사람과 사람은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결국 평화를 이룬다. 내가 그들을 적대시하는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면 아마 그 순간 그들도 그 느낌을 알아챘을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며, 글을 통해서도 진실과 거짓을 금방 구별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이제 할 일은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도록 연결되도록 하는 것 일상에서 그 노력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언급한 Connecting the dots는 결국 관계 안에서 이뤄지는 능동적인 문장뜻하는 것을 모두가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기쁨아, 사랑하는 기쁨아 앞으로 네가 살아가는 세상은 AI로 인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엄청난 규모의 발전을 이뤄갈 거야


자동화가 가능한 분야는 모두 그렇게 되고, 엄청난 혁신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거야. 사람 모양을 한 로봇들이 실제로 말을 걸어올 거고, 혼자 사는 사람들은 그 로봇들과 함께 삶을 사는 예상치 못했던 삶을 선택하게 될 거야.


하지만,


기쁨아 사는 날 동안 살아있는 생명에 집중해 살아가 주었으면 좋겠어.


사람, 동물, 식물까지도 살아있는 생명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는 기쁨 이가 되면 좋겠어.


아빠는 너를 통해 세상이 중요한 변화를 맞이할 거라 말하고 싶어. 왜냐하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장대비처럼 예수님 사랑 듬뿍 받고 자라고 있으니까, 지금 느리고, 서투르고, 남들보다 부족해 보여도 괜찮아


네 커다란 사랑 탱크에 예수 사랑 가득 담아,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서, 예수님이라면 했을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들에게 그대로 전해주길 바라. 물론 완벽할 수 없을 거야. 여러 실수도 있을 거고, 그러나 그래서 마음이 어렵다면 그때마다 성경 말씀에 천착해서 그다음을 어떻게 진행해 나가야 할지 그 방법을 안내받기를 바라. 승리할 거야. 다 잘 될 거야.


기쁨아 아빠가 기쁨이 많이 많이 사랑한다. 오늘 오후에 재활 병원에 같이 가기로 했는데, 이따가 병원에서 만나서 또 우리 사랑하자. 아빠가 오늘도 너에게 줄 수 있는 아빠의 사랑을 폭포수처럼 흘려보내줄게. 사랑해 아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5:18)


 

아빠 엄마 흑인아저씨 여수박람회에서



P.S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많고 상황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연재 약속을 지키고자 건강이 허락하는 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세상에 잘 정리되어 책으로 나올 때까지 여러 독자님, 작가님들께 중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제 23화를 발행하고 오늘 24화를 바로 발행해서 많은 분들이 23화를 못 보실 것 같아, 몇 자 남겨 놓습니다


24화를 읽어 주신 분들은 23화도 함께 읽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 눈이 부시게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쁨 아빠 드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