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헤브 Jun 05. 2024

25화_먼 나라이웃나라_인도가족 편_세계시민_3

인도가족은 저와 아내, 기쁨 이에게 가족이상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이죠

Republic of India (인도)

* 남아시아 국가
* 총 GDP 규모 : 세계 5 대 경제 강국
* 종교의 발원지 (힌두교,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
* 인구 : 2023년부터 세계 최대 인구 국가
* 대도시 : 뭄바이, 벵갈루루, 첸나이, 하이데라바드, 콜카타 등
* 고대 인더스 문명 발원지
* 실리콘 밸리 등 미국 거대 IT, Tech CEO 중에 다수가 인도인으로 구성되어 있을 만큼 숫자에 밝고 교육열 뜨거운 나라  
* 행정구역 : 28개의 주, 8개의 직할지(1개 수도권 포함)
* 언어 : 인도 내 780개 언어, 헌법 지정 언어 22개,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인구가 많음
* 종교 : 힌두교 (약 80%), 이슬람교 (약 14%), 기독교(2% 정도)


아빠~ 케니 누나 있는 곳까지 가려면 비행기로 몇 시간 걸려요?
직항으로 가면 평균 소요 시간이 대략 27시간 걸린데
이동 거리는 자그마치 18,385km 거리를 비행해야 하고~
다른 사람은 20시간 정도면 간다는 말도 하네
어떤 경로(방향)를, 어느 (속도)로 가느냐에 따라 다른 거겠지

 케니 누나가 사는 곳은 우리가 사는 서울과 14시간 시차가 벌어져 있어
지금 오전 7시니까 그곳은 어제 오후 5 시인 셈이지.
신기하지? 지구라는 곳이 그래~
동그란 지구 표면을 뺑 돌려 들여다보면
 태양 쪽을 향해 있는 앞 면은 낮이라 부르고, 반대쪽은 깜깜한 밤인 셈이지

그래서 누나가 사는 그곳은 아직 초저녁 시간을 지나가고 있어

한마디로 우리가 미래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거야
누구에게는 현재 시간이
다른 누군가에는 내 미래 시간에 있는 셈이지
중요한 사실 알았으니
오늘도 우리 모두 감사(Gratitude)와 기쁨(Joy)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자

그래서 케니 누나에게 네가 얼마나 하루를 알차게 보냈는지 나누고, 곧 다가올 미래 시간에 누나 역시 기쁨으로 알차게 시간을 쓸 수 있도록 격려해 주자
무엇보다 케니 누나의 어려움을 엄마, 아빠가 잘 아니까
우리 케니 누나를 위해 아주 오래 기도를 많이 해주자

 오늘은 아빠가 케니 누나와 칼 아저씨, 수 아주머니 세 사람에 대해,
지난 7년 간 쌓아온 우리 여섯 명 우정(Friendship)에 대해 이야기할 거야

 준비 됐지?
자 그럼 살포시 눈을 감아봐
타임머신 곧 떠날 거니까~ 긴장하지 말고
아빠 손 꼭 잡고 그때 그 시간으로 함께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사랑해 기쁨아!
많이 많이 사랑해!


국립재활원에 있을 당시였다. 우리는 다른 병원을 3개월 단위로 돌고 돌아 다시 국립재활에 돌아왔던 때였다. 여섯 명이 한 방을 구성하는 형태로, 양 옆 세 칸씩 바퀴 달린 침대와, 침대와 침대 사이 좁은 공간에 놓인 간이 바닥 쪽침대가 문 앞에서 한눈에 보였다. 다행히 낮병동이라는 제도(오전, 오후 총합 6시간 이상은 한 병원에 체류하며 치료하는 제도)를 통해 저녁에 잠은 집에 가서 잘 수 있는 제도가 있어, 지방에 집이 있지 않는 경우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제도를 통해 자기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여느 사람들은 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병원에 다시 찾아오고, 또 다른 사람들은 지방 이를테면 부산이 집인 관계로 오갈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 놓인 사람들은 지방에서 가끔 손님들이 오시거나, 달에 한두 번씩 KTX 나 자차 등을 타고 집에 한두 번 다녀오는 형국이었다.


그 모두를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 한쪽이 탁 막히고,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지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빠르게 연결되는 면도 있었지만, 짧게는 1개월, 길게는 3개월, 다른 병원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동들과 그 부모 사이에 만남과 교류로 이미 수년 동안 관계를 맺어 온 덕택이기도 했다. 한 가정 한 가정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닌 게 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만나면 반가웠고 아이들은 금세 자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국립재활원에서 치료를 받는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 매우 아픈 사정을 갖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보다 더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재활원에서 입원 허가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심초사하며 언제 연락이 오려나 싶어, 하루가 멀다 하고 이쪽저쪽 병원에 전화를 돌리는 어머님들, 아버님들이 계셨다. 나 역시 그 역할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그 심정이 어떤 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기쁨 이가 기고, 앉고, 일어서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서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 앞에 처절한 마음이 들었지만 결국 아이는 일어나 걸었다. 초기 진단 날 의사의 부정적인 예상과는 달리 재활을 통한 차도가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나타나고 있었다. 어두웠던 세상에 희망의 옅은 빛이 조금씩 그 얼굴을 지표면 위로 내보이기 시작했다.


기쁨이 보다 훨씬 심한 아이들도 많았다. 산소포화도를 계속 측정해줘야 하는 아이들, 경기가 심해 먹는 중에, 먹고 나서 쉬는 중에도 경기를 하는 아이들,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할 수 없는 아동들, 콧줄을 껴야 먹을 수 있고, 주기적으로 수술을 받으러 병실을 며칠씩 비우는 아이들, 가지각색의 어려운 사정이 모두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러는 중에 세상은 온갖 추문으로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들만 뉴스로 전해주었다. 이런 아픈 현실에 놓인 가정들의 이야기를 관심 갖고 지켜보며, 할 수 있는 손길을 내주어야 할 세상은 무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12월 말이 되면 잠시 잠깐 비추는 스포트 라이트. 그 빛은 지나치게 눈이 부셔 눈앞을 뿌옇게 만드는 빛이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없었다면..



가슴이 답답했다. 외롭고 소외받는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모든 일을 해 나가야 하고, 병원비는 왜 이리 비싼지, 개중에는 자가를 팔고, 전세로 옮겼다가, 월세로 전전하는 가정도 여럿 있었다. 보험 소송에서 패소하는 가정은 달에 수백만 원 발생하는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절망했고, 더 이상 할 수 없는 형편에서 그래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치료했다. 흐느끼며 우는 엄마들, 아이를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숨죽여 우는 엄마들 뒷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바라보는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세상이 야속했다. 이번 주말은 어디 가서 뭐 하며 놀까? 이번엔 어느 나라로 해외여행을 떠날까? 강남에 집 한 채 사기 위해 주식투자니 부동산 투자니 열심을 내야 하는 때라고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부자가 될 수 없다 하는 그런 말들이 공중에 떠다니는 부유물 중 하나처럼 느껴졌고 당시 나와는 별반 관계없는 말처럼 여겨졌다.


결혼 후 7년 안에 신혼부부 청약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 우리 역시 기쁨이 재활에 매달리느라 그런 제도를 알 겨를도 없었고 활용할 생각은 더더구나 하지 못한 채 7년을 지나 버렸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지만, 그 상황을 놓친 게 못내 아쉬웠다. 시도를 했으면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을 몇 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온 만큼 후회는 없었다.


국립재활에 있는 기쁨이와 아이 엄마를 챙기러 회사에 연차나 반차를 내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병실에 웬 외국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눈망울이 크고, 아주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인도 어린이였다. 그 옆에는 분주하게 아이를 챙기고 있는 그 아이 엄마가 계셨다. 아무 말 없이 한 참 방안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모두들 자기 아이를 챙기느라 바빴다. 토를 하는 아이, 투정을 부리는 아이, 치료를 위해 방문을 나서는 아이, 제 각각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나, 한두 시간 넘도록 그 어린아이와 엄마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주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았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인도 엄마는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었지만 영어나 힌디어로 소통이 가능한 경우에 놓인 사람이었다. 방실 어머님들도 다 관심이 있고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과적으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두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면서, 속으로 계속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상황에서 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내 마음에 주님이 이제는 가서 말을 걸어도 좋겠다 마음 주시는 것 같았다. 이미 그녀도 두 시간 동안 나를 봤으니 당황하지 않게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 후 자기소개를 했다. 이렇게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아이가 참 예쁜 미소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얼마 간의 대화 중에 남편에 대해 물어보았다. 남편 분은 얼마나 자주 이곳에 방문하시는지 알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 달이 흘렀을까? 아이 아빠가 오는 날에 맞춰, 내 연차를 썼다. 그렇게 처음 칼(Kar)을 만나 내 명함을 건네주었다. 내 신분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그가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처음 그 가정을 만났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이주 노동자 가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이 분들에게 가까운 형제가 되어주어야지. 마음 나눌 곳 없는 외지인들에게 10년 전 내가 받은 그 사랑 그대로 흘려보내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도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도 명함을 꺼내 내게 주면서, 자신을 공학자라고 소개했다. 명함을 읽어 보니 그는 서울 소재 대학에 공학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국립 재활원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는 나를 만나는 걸 약간 부담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자신에게 다가 올 이유가 하등 없는 사람이 어느 날 나타나서는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오는 게 약간 불편한 듯싶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석 달 계속되는 전화와 안부를 묻는 내 관심 속에서 그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렇게 처음 바깥에서 그 가정과 우리 가정은 식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인도 가정집에 여러 번 놀러 가서 케니 엄마가 해준 인도 음식도 먹고, 우리가 준비해 간 선물도 나누면서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칼은 자기 사무실로 어느 날 나를 초대했다. 연구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 저널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간하던 매우 성실하고 진실한 한 사람이었다. 7년 동안 그를 알고 지내면서 돌이켜 보았다. 그와 밥 먹은 횟수를 다 더해 보니,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어떤 지인들보다 많은 시간을 우리 둘이 만나 식사하고, 차를 마시고, 산책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십 번 식사를 했고, 수백 시간 이상 통화를 나눴다. 그는 한국어를 읽고 아내 보다 나은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했지만 전문 용어나 일상 회화는 막힌다고 했다. 필요가 있으니 공부는 조금씩 했지만 자신이 교수로서 감당해야 하는 연구와 해외 학회지 발간, 나와 마찬 가지로 딸을 케어해야 하는 주 임무가 있어 한국어를 충분히 공부할 시간이 없어 보였다.


칼은 나 보다 형이었다. 나는 형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형이 필요한 모든 행정적인 도움을 혼자 해결하지 말고, 막히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그게 주중이든, 주말이든 내게 연락을 하고, 나와 만나든지, 이메일이든 전화통화로든지 같이 문제를 풀어가자고, 나 역시 10년 전에 미국에 잠시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귀한 사람대접을 받았던 경험이 있고, 해외에 홀로 나가 살아보면서 다문화, 다민족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말해주었다. 


칼은 내 말을 경청해 줬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에 풀리지 않는 문제를 들고 왔다. 비자를 갱신하거나, 아이 치료에 관해 어느 병원, 관공서, 공무원과 대화 혹은 그 무엇이 필요할 때마다 스스럼없이 전화를 바꿔주었다. 몇 십장이 되는 한글 서류 뭉치를 들고 와서 이 내용이 전반적으로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 고맙겠다 했다. 회사 일이 너무 바빴지만 나는 그를 섬기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첫 번째 일이라고 확신하며 살았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33-34)


교회 예배당 앞 설교 순차통역 따라하기

칼은 훌륭한 교육자였고 연구자(Researcher)였다. 그는 매사에 최선을 다했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배려를 먼저 하려 했으며, 우리는 배려 싸움 하듯 서로를 위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종교가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나를 통해 배우려는 마음을 가졌다. 나는 상당히 오랜 시간 그와 그의 가정을 놓고 기도하면서 어느 날 영어 사영리(기독교 복음 소개 책자)를 읽어주며 그리스도가 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들려주었다. 거리가 한 시간이 되는 데도 불구하고 7년 동안 7~8회 교회에 와주었다. 



어느 날은 통역을 제대로 해 주고 싶어 부 목사님에게 당일 설교 원문을 미리 받아, 통역을 준비하고 예배를 함께 드리기도 했으며, 본당에서 말하면 설교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본당 바깥에 의자를 두 개 깔고 목사님이 설교가 끝나면 순차 통역처럼 가능한 중요한 부분을 빠짐없이 전달하려고 했다. 예배를 몇 번 드리면서 그도 궁금한 포인트가 있으면 내 귓속에다가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정도로 그는 관심을 보였다.



2023년 10월, 십 년 정도 살았던 한국땅을 뒤로 한채 미국으로 칼 가정은 이민을 떠났다. 개천절 인천 공항에서 그 모두와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매운 음식도 잘 먹었고, 내게 인도 음식점에 가서 음식 하나하나의 특징과 맛에 대해서 열변을 토한 적도 있다. 그만큼 나를 동생처럼 귀하게 대접해 주었다. 몇 년 전 케니 생일에 맞춰 생일 케이크를 들고 가, 그 아빠를 감동시킨 8월의 어느 밤, 나는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혼자 울먹거리며 기도했다.


주님 케니 가정을 보살펴 주세요.
제발 저 아이가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기적을 허락해 주세요
그만 아프게 해 주세요. 그만 고통을 허락해 주세요
교회 구석구석 탐방

케니는 7년 동안 쑥쑥 자랐다. 기쁨이 보다 한두 살 누나일 뿐인데 키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컸다. 얼마만큼 엄마 아빠가 그 어린 딸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는지 케니 얼굴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마음에 담은 이야기를 했다.


형은 멋있는 사람이에요. 형은 내가 아는 많은 사람 중에서도 단연 멋진 가장이고, 성실하고 반듯한 사람입니다. 이런 형을 내 가족처럼 느낄 수 있게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요.

형이 예수님을 언제 믿을 줄 나는 모르지만, 언젠가 형의 마음에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생기면 좋겠어요. 그러나 강요하는 것 아니니, 형 편한 대로 하세요.

다만 예수님이 형 가정을 사랑하시고,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꼭 알아주었으면 해요 형은 믿는 사람들보다 어느 면에서 더 믿음이 있는 사람 같아요 예수님은 형을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예수 믿으세요
어느 토요일 예배를 마치고 조용히 추억 한컷

우리는 자주 어린이 대공원에도 놀러 가고, 그 대학 주변 음식점도 많이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형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국에 와서 아직 바다에 가서 제대로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떠오르고 나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후에 이 날 단박 여행으로 을왕리 해수욕장에 가자고, 내가 차가 있으니 형 집으로 아침 9시까지 갈 테니 시간이 가능한지 궁금하다 물었다. 그는 흔쾌히 가겠다는 대답을 했고, 그날 사정이 되지 않은 아내는 다음을 기약하고, 케니, 칼, 수 세 가족과 기쁨이, 나 이렇게 다섯 명이 인천 앞바다로 떠나기로 했다.


그날 알았다. 그날이 칼의 생일이었다는 것을.


오 주님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 날이 형의 생일일 수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주님 좋은 하루를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집에서 한 시간 가까이 걸려, 칼의 집 앞으로 픽업을 갔다. 출발은 오전 8시경 했고 9시 반 정도에 출발해서 을왕리에 도착하니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카페를 찾았다. 시원한 음료를 시키고, 저녁까지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석양을 즐겼다. 두 사람 모두 제주를 제외하고 한국 바다에 와서 노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아이가 뛰어다닐 나이가 되었는데도 늘 커다란 휠체어 기능의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형님 부부가 애잔했다. 우리는 그렇게 아이 한 명을 유모차에 태우고 케니, 기쁨이 모두 흥분한 상태로 온종일 매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밤이 되고 기쁨이 사정이 있어 우리 집을 먼저 들려 기쁨 이를 내려 주었고 출발하기 전 아내에게는 미리 전화를 해 놓고 생일 케이크를 사놓고 준비해 두라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내는 "그렇게 할게요"라는 답을 주었다


밤 10시경 우리 집 앞에 기쁨이를 내려 주고, 케이크를 받아 뒷자리 수에게 넘겨주었다. 해피 벌쓰데이 투 칼~ 그리고 다시 케니 집에 도착하고 나니 11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주간 보다 20분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조용히 배경 음악으로 찬양을 틀어 놓았다. 창문을 연채 돌아오는 길 내내 30~40분 동안 나는 펑펑 울었다. 지나간 하루가 너무나 감사해서, 어쩌면 주님은 그의 생일에 우리의 만남을 계획하고 계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너무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 가정이 그날 시간이 안되었더라면, 반대로 우리 가정에 어떤 일이 있었더라면 생일 축하를 당일에 직접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테니 말이다.


차에게 내리는 그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손짓과 함께


생일 축하해 ~ 칼
  
24년 5월 어느 날 미국 한국 간 영상통화


내 생애 수많은 소중한 밤이 지나갔지만, 그날 밤은 내게 영광스러운 날 중에 으뜸으로 기억된다. 예전에 그 가족의 비자를 갱신하는 과정 중에 내가 비자 제도에 대해 전혀 몰라 공부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도 회사가 너무 바쁜 때였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니 몸이 닳았다. 너무 피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자 신청 기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었고,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될 수 있었음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시간을 내어, 그의 일을 나의 일처럼 공부하며 같이 알아갔다.


아이 일로 주민센터에 갔을 때 이해 되지 않는 설명을 이해하고 싶어 전화가 오면, 시간을 잠시 내어 그와 통화하던 나날들, 그는 나를 정말로 동생처럼 믿고, 맡겼다. 심지어 나는 그를 가끔 형이라 부르며 의지하기까지 했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수백 통 통화를 할 때마다, 그가 들려주는 인도 사람들 이야기, 인도 문화, 종교, 정치, 교육, 사회 이슈 등을 들을 때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 이제는 친숙한 나라로 느껴지는 변화를 체감한 적이 많았다. 그는 몇 년에 한 번 인도를 다녀올 때마다 내게 넥타이며, 인도 차(tea), 보석함, 커피, 액세서리 등을 선물해 주었는데 그가 떠난 지금, 나는 그 보석함을 보며 그를 추억한다. 언제든 그가 그리우면 14시간 시차를 두고 여전히 페이스톡을 통해 얼굴 볼 수 있어 감사하지만, 어서 그를 직접 만나고 싶다. 지금 만날 수 없어서 그가 남겨준 소중한 선물에 자꾸만 눈이 간다. 


작년 10월, 인천 공항에 여섯 명이 모였다. 인도 사람 세 명, 한국 사람 세 명, 기쁨이는 자기도 비행기 타고 싶다고 잠깐 떼쓰기도 했지만, 출국장 문을 통과하여 사라지는 세 명을 향해 우리는 모두 바이바이 했다. 이민 짐이 너무 많아 미리 배편으로 상당수 짐을 보내는 것도 도왔지만, 여전히 그가 비행기 화물칸에 넣은 짐 말고도 큰 가방이 여러 개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항 직원에게 아이가 장애가 있으니,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탑승 수속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달라 부탁했고, 그의 도움으로 그 가정은 조금 더 빠르게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한 달에 2-3번, 바쁠 때는 1-2번 정도 꾸준히 통화를 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그를 그립다고 하고, 그는 자기가 사는 미국 루이지애나로 어서 놀러 오라고 한다. Jazz(재즈)의 도시, 재즈 가수 Nat King Cole (냇킹콜) 음악을 애정하는 나로서는 그가 루이지애나로 간 것마저 신기하다. 언젠가 상황이 열리면 그에게 꼭 가겠다 약속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가는 그날까지 아무 사고 없이 건강하게 지내야 한다는 걸 당부하며 지낸다. 이젠 그가 어떤 중고차를 사면 좋겠냐는 질문을 던져 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미국 중고차 시장, 국내 중고차 정보를 공부해서 의견을 그에게 주는 일이 남았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유산을 남기는 삶


우리 기쁨 이가 이 모든 걸 보며 자라고 있다. 기쁨이는 아직 아빠가 왜 이렇게 사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주 조금씩 그도 알아채고 있는 것 같다.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그 가는 길목마다 예비해 두신 수많은 아름다운 항구를 들려, 그곳에 잠시 잠깐 내려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열정을 다해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이 모든 인생 여정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우리 기쁨 이가 맛을 보고 그 축복의 가치를 알아차리고 있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107:30)

 



사랑하는 기쁨아 아빠가 약속할게. 우리 기쁨이 데리고 엄마랑 셋이 손잡고 기쁨의 날, 미국 루이지애나에 가자 그래서 칼 삼촌, 수 이모, 케니 누나와 우리 부둥켜안고 울면서 그간 못 나눈 정을 꼭 나누자. 아빠가 열심히 살아서 잘 준비해 놓을게


네게 주고 싶은 마지막 말씀은 이거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3)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 하나와 그를 아는 것 둘, 그래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그분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까지, 말 그대로 충만할 때까지 자라가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천착하고 날마다 깨어 1시간 기도하고, 삶이 예배가 될 수 있도록 네 마음에 욕심을 끊임없이 내려놓아야 할 거야


아빠도 너도, 엄마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해야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우리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가자 사랑해 기쁨아   


아래 사진은 기쁨이 너를 향한 엄마의 글이야


너는 사랑을 먹고 자라는 아이,


지난 10년 동안 먹고 잘 자라고 있지. 그래서 아빠는 걱정 안 해


하나님이 알아서 너를 키우실 거거든

기쁨이 엄마 아빠 글 각각, 장애인의 날 투고로 장려상 받았던 날, 벌써 10년이 가까워오는 그 날들
이전 24화 24화_먼 나라이웃나라_아프리카 편_세계시민_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