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 일기

무계획이 계획

by 전소

7월 말 코펜하겐 공항에서 코펜하겐 시내로 들어가는 트램에는 빛이 가득하다.

하얀 커튼 같은 초여름의 햇살이 트램 유리창에 걸려 마치 천국으로 가는 열차 같다.

나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무거운 배낭에 몸을 기댔다.

이제는 덴마크다. 여기서는 뭘 하게 될까.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공항에서 코펜하겐 시내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호스텔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잠깐 둘러본 코펜하겐은 유럽의 어느 도시와 비슷해 보였다. 다른 게 있다면 조금 더 새것 같고 넓은 느낌?

다른 유럽 도시들보다 역사가 짧아서 그런가. 사실 덴마크 대한 역사 공부 같은 건 하지 않아서 모른다.

크게 새로울 것도 기대되는 것도 없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놀랍고 새롭기만 했던 유럽도 배낭여행으로 3개월 넘게 걷다 보니 버석 마른 모래 같이 되어 버렸다.


호스텔에 돌아와 와이파이를 연결한 뒤 익숙하게 카우치 서핑 웹에 접근했다.

카우치 서핑이란 자신의 카우치 - 소파 등을 여행자에게 제공하고 문화 교류도 할 수 있는 취지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인데

혼자 하는 여행에서 현지인과 어울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여행 내내 기웃거렸다.

재수 없게 사이코가 걸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한 번도 카우치를 빌린 적은 없지만

왠지 덴마크에서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당도했기 때문에 현지인과의 시간이 더 필요할 거 같았다.

유럽 여행을 누가 이렇게 맹물에 물탄 듯 무계획을 가지고 오냐고 놀랄 수도 있겠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무계획’이 계획인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입사 후 3일 만에 알아차렸다.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님을.

회사에서 일이랍시고 하는 것들, 조직 문화, 회식 이런 것들이 하나도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바로 알 수 있었다.

일이 없어도 모니터를 바라보며 뭔가를 하고 있는 듯이 꾸며야 하는 행동들,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같은 조직 내에 있다는 이유로 수없이 많은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문화.

일이랍시고 던져주는 것들의 가치를 알 수 없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업무

그리고 외모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관심과 평가

이 모든 것들이 구역질 나게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뭔가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하기 싫은 것들을 견디며 해야 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싫은 것들을 견뎌낼 수도록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으니까.

매일 아침 죽도록 가기 싫었던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것들을 꾸역꾸역 참고 견디다 보니 대학교에 갔고

역시나 하기 싫은 것들을 참으며 - 수업을 듣고 과제를 내고 시험을 치렀더니

회사라는 다음 관문이 시작되었다.

그러니 너무너무 싫었지만 당연히 견뎌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원하고 잘하고 재미있어하는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사실 크게 관심도 없었다.

그냥 내가 견디고 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렇게 3년이 넘게 일했다.

그러고 보니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년 넘게 견디고 해야 하는 것들을 착실히 해왔는데

이제는 - 그냥 아무 계획도 없이 맹물에 물 탄 것 같은 것들을 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 무계획‘이 계획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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