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그거 내 건데?
회의를 빙자한 전쟁터
월간 계획을 짜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논의하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별도의 진행자가 있진 않았으나 자연스레 취합하는 쪽에서 분류를 하기 시작했고 더럽고 유치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점점 세련되고 정제된 아이디어로 발전해 나아갔다. 부족한 건 많았고 공감이나 서투른 표현을 정리하면서 점점 아이디어의 방향과 디테일들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회의는 마무리되었고 세부사항과 RNR(역할과책임)및 에디터 회의를 진행한다. 기획은 누구 진행은 누구 촬영은 누구 스냅은 누구 문서는 누구 편집은 누구 자막은 누구 그래픽은 누구 모두 머리를 짜내 정리하고 퍼즐을 맞춰간다.
성공적인 과정들을 통해 중박 정도의 결과물이 나왔다. 다들 기뻐하며 참여에 대한 열의와 보람을 가졌다. 뿌듯하면서도 오묘한 기분.
뿌듯한 것은 점점 도달 범위와 콘텐츠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이를 이뤄가는데 한몫했다는 부분에 있어서 자아실현을 조금은 이루어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정상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으며 결과물 또한 좋은 평을 받았다.
오묘한 것은 이후에 드러난 문제들 때문이었다. 공을 나누는 과정에 있어서 제대로 된 언어적, 물질적,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 회의 참여자들의 의욕상실이 점점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눈에 가장 잘 보이는 부분 중 결과물을 도출하는 프로세스의 사람은 물 흐림과 사내정치를 이용했다.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겉으로는 모두들 축하하는 분위기와 웃으며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조금씩 깨져가는 팀워크를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시니어들 조차도.
시간이 흘러 다시 회의시간이 왔다.
이제는 누구도 제대로 된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는다. 의욕은 없고 각자의 인정을 드러낼 수 있는 것만 찾는다. 이제 이곳에서 팀워크는 마치 호박에 줄을 그어 수박을 만드는 것과 같이 아무 의미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없는 그저 의무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나는 역할 및 책임을 다하지 않는 프로세스를 문제시한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을 탓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상의 공을 함께 누리지 못한 (없다시피 한) 사내 시스템을 탓한다. 시니어는 아부하기 바쁘고 일하는데 모든 시간을 쏟는다. 관리직은 관리를 할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을 내지 않으며 디렉팅은 없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시스템이 없다. 그러면 개인의 스킬과 능력치는 무궁무진하게 조절할 수 없이 표면으로 드러난다. 매니저가 없으니 모든 근태, 언동은 소문이 된다. 서로에게 기회가 있음을 느끼는 야심가들은 끝없이 불을 당기며 활시위를 당긴다. 누군가는 영웅이 되며 능력자가 되고 누군가는 그로 인해 도태되고 짓밟힌다.
원초적인 원탑 시스템(사장님이 짱)이 생성되며 비로소 많은걸 깨닫는 이들도 생겨난다. 이는 장단점이 뚜렷하다. 독자가 이미 예측할 수 있다시피 마치 군대 시스템처럼 돌아가기 시작한다. 근데 여긴 상명하복이 없다. 하극상도 연대감도 팀워크도 열과 성의도 모두 사라진 공산주의 같은
오묘한 느낌.
누굴 탓하겠는가. 자율에 의한 책임을 지는 사람과 열과 성의에 답하지 않는 이상한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근데 참 많이 봐왔던 모습인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