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 아닌 성장하는 갓생
매해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제도서전은 해가 갈수록 발 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정작 제 현실세계에서는 의외로 책 읽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해 많은 책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저희 집 서재를 본 사람들은 늘 놀라곤 합니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은 거냐"고요. 그러면 저는 단번에 지식인으로 등급이 매겨지고, 그럴 때마다 당혹스러워 우왕좌왕 손을 내저을 뿐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예전에는 그런 반응이 저를 우쭐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책장의 책들은 '열심히 살고 있는 증거물' 같았으니까요. 관심 분야의 신간은 죄다 훑어봐야 했고, 베스트셀러 또한 놓칠 수 없었고요. 온라인 서점의 장바구니는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위시리스트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읽는 속도는 책을 들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책은 읽을수록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고, 세상엔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느린 제 속도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결혼으로 삶의 모양이 달라질 때, 육아로 내가 희미해질 때, 새로운 커리어를 키워갈 때마다 책은 든든한 멘토이자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도, 행복할 때도 곁에 있어주었고요. '나의 30대를 책이 키웠다'는 말도 과장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순간, 삶의 모든 문제를 책에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답은 책 속에 있을 거라 믿으면서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책은 힌트를 줄 수는 있어도, 완벽한 답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살아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존재했으니까요. 되돌아보면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책을 뒤적였던 건, 어쩌면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실패 없는 인생이 가능할까요? 인생을 실패한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요?
한때는 커리어의 성공이 곧 성공한 삶이라고 믿었습니다. 자본주의를 공부해 불안하지 않는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수긍할만한 삶을 만들기 위해 현재를 기꺼이 내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으로 대비하는 삶과 실제로 살아내는 삶이 만나야 비로소 진짜 성장이 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현재를 온통 미래로 미뤄놓는 것은 진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공과 실패로만 세상을 나누던 이분법인 안경을 벗고 책 속에 파묻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니,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되는 기분이 듭니다. 실패도 삶의 일부라는 걸 이제는 글자가 아니라 감각으로 느낍니다. 아무리 삶을 예습해도 실패는 결국 만나게 되는 손님이니까요.
주기적으로 책장을 정리합니다. 기준은 단순합니다. 저자의 말에 이미 동의했거나, 그와는 다른 나만의 의견을 확고히 갖게 되었을 때, 기쁜 마음으로 책과의 인연을 정리합니다. 저자의 의견은 저자의 삶에서 나온 결실이니, 그대로 복사해 붙어넣기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제 책은 제게 하나의 사례일 뿐이니까요.
여전히 '성공하려면 이 책을 읽어라'는 콘텐츠가 종종 눈에 들어옵니다. 과거에는 간절히 비밀을 찾듯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건 아마도 성공의 정의가 달라졌기 때문일거예요.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면서, 동시에 약간의 호기심으로 조금씩 확장하는 삶. 현재 제가 살아내고 싶은 삶입니다. 때로는 현재에 머물며 깊이 감각하는 독서를 하고, 때로는 사람과 세상을 넓히는 독서를 합니다. 성공이 아닌 성장하는 갓생. 여전히 책과 함께 살아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