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멀리 나아가게 하는 글쓰기
유독 예전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은 물론, 대학 시절 이후 사회초년생의 모습조차 희미합니다. 한 번은 대학시절부터 함께해 온 친구를 통해 과거의 제가 쓴 편지를 다시 본 적이 있어요. 15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으니 낯선 감정은 당연했겠지만, 그 편지를 다시 보는 일은 저에게 꽤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죠. 아직까지도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좋아하고 있지 않구나, 하고요.
꾸준히 과거를 지워왔습니다. 결혼 전에는 학창 시절 매일같이 우정을 다짐하던 편지들을, 결혼 후에는 만남과 헤어짐을 빼곡히 담아낸 청춘의 기록들을, 그리고 존재의 이유를 잃은 과거의 사진들도 제 공간에서 순차적으로 내보내졌습니다. 아마도 매 순간 잊고 싶지 않아 열심을 다해 찍었던 사진이었을 텐데 말이죠.
그 무렵부터 저는 삶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미래를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아직 살아내지 않은 하루를 계획하고 수정했습니다. 지난날은 성공과 실패만이 존재했습니다. 저에게 회고란 '동그라미'와 '엑스'표기를 정산하는 일과 같았습니다. '동그라미를 남긴 나'만이 살아갈 이유가 되었고, 현재 힘든 이유는 모두 '엑스'때문이라 여겼습니다. 그럴수록 실패가 내 삶에 들어올 수 없게 더욱 촘촘하게 나를 삶에 끼워 넣었습니다. 갓생만이 나를 빛나게 할 거라 믿으면서요.
요즘 수영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가장 낯선 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속에 머무는 경험이 아닐까 싶어요. 숨을 잠시 멈추고 머리를 깊게 숙이면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물속의 고요함을 편안하게 감각하게 되더군요. 그제야 팔을 뻗고 다리를 차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더 힘껏 발차기를 하며 속도를 내는 건 그다음의 일이었습니다. 갓생도 마찬가지였어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삶이라는 물속에 충분히 머물러 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에게는 그게 글쓰기였습니다.
하루의 시작점에서 미래를 그리는 일은 여전합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현재를 먼저 기록한다는 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채워야 할 칸이 빼곡한 스케줄러 대신 빈 노트를 펼칩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잠에서부터 하루를 시작합니다. 수면 시간은 충분했는지, 몸은 충분히 회복되었는지 살핀 뒤 성취를 위한 투두리스트가 아닌, 오늘의 나에게 필요한 하루를 준비합니다. 충전이 필요하다면 일보다 휴식을 먼저 넣어둡니다.
수영을 처음 배우는 순간이 있듯, 누구나 인생을 처음 살아내는 초보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청춘은 서툴 수밖에 없겠지요. 때론 십수 년이 지난 일조차 이불속에서 발버둥을 쳐야 겨우 벗어나기도 합니다. 누군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 애를 쓰고 있다면, 저는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해줄 겁니다. "누구나 삶 앞에선 초보"라고요. 글쓰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에 머물러 본 뒤에야 저도 제게 같은 말을 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온 마음을 다한 위로와 용기는 어디에서도 얻기 어려웠습니다.
한때 우울과 불안장애로 긴 터널을 지나며,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든 적이 있어요. 길게 이어가진 못해 열 편의 영상에서 멈췄지만, 그 채널의 배너를 만들었을 때의 마음은 또렷이 기억합니다. 지금 돌아보니, 저는 그때 이미 갓생의 방향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균형을 잃고 잠시 나를 돌보지 못했을 뿐, 결국 그 이야기는 미래의 제 자신에게 건네고 싶은 말들이었습니다.
잘살다 : '부유하게 살다'라는 뜻의 동사
잘 살다 = 잘 + 살다
1. 잘 : 옳고 바르게, 좋고 훌륭하게
2. 살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 본래 가지고 있던 색깔이나 특징이 뚜렷이 나타나다.
글쓰기는 저에게 '잘' 살고, 동시에 '잘살고'싶은 마음을 붙잡아주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 둘은 중심을 잡지 않으면 쉽게 기울어지곤 합니다. 내가 지나온 시간을 충분히 들여다보는 회고는 '잘 살기'를 위함이고, 그 과정은 나에게 맞는 '잘사는' 길을 보여줍니다.
저의 기록에서 없어져야 할 건 과거의 기록이나 사진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동그라미와 엑스였어요. 청춘의 흔적을 많이 지워버렸지만, 그것 또한 '엑스'로 기록하지 않으려 합니다. 기록을 지워나가던 저 역시, 물과 친해지려 애쓰다 잔뜩 물을 먹고야마는 열정 가득한 초보 수영러와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불현듯 물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몸이 기억했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허공을 딛는 듯 불안해지는 순간 말이에요. 그럴 때면 다시 천천히 물속에 머무릅니다. 숨을 고르고, 물결을 타고, 물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 느낌이었지' 하고 반가운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글쓰기 역시 그렇습니다. 하루를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이 조용한 기록은 내 삶의 준비운동이자 정리운동이 되어줍니다.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나를 돌보고, 나를 세웁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다 보니, 삶이라는 물이 한결 더 편안해진 듯합니다. 이제 준비가 된 것 같으니, 다시 팔과 다리를 뻗어 속도를 올려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