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 사는 법
세상이 입을 모아 "너도 월 천만 원 벌 수 있어!"라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소위 자기계발 강사들은 자신을 월 천으로 이끌어준 '인생책'이라며 경쟁하듯 콘텐츠를 만들어 날랐고, 그들의 말은 하나의 진리처럼 굳건하고, 동시에 유혹적이었습니다. ‘월 천‘을 위한 갓생 전략은 대게 비슷했어요. 아침에 이불을 정리하며 하루를 시작할 것, 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를 할 것,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될 것.
‘생산자’라는 개념조차 몰랐던 제게, 무대 밖의 조명이 한순간 켜진 듯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만 같았습니다.
물리치료사로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면접을 보고, 연봉 협상을 하고, 근로계약서를 쓰는 일련의 과정은 저에게 너무도 당연한 절차였습니다. 3년간의 보건대학 교육을 거쳐 면허를 취득한 저는, 스펙 전쟁에 시달리던 친구들과 달리 무난하게 진로레일에 순조롭게 올라탄 셈이었죠. 겉으로는 순탄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문자 그대로 숨이 막혀 병원 옥상으로 뛰쳐나가는 날들이 늘어갔습니다. 처음엔 직업이 아닌 직장의 문제라고 여겼어요. 요양병원 특성상 어두운 노년의 삶을 가까이서 보았던 탓이라 생각했죠. 그러나 ’더 이상은 이 일을 이어갈 수 없겠다 ‘는 마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선명히 기억합니다. 좁은 물리치료실 접수데스크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동료들, 흐릿해지는 주변 풍경 속에서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또렷해진 순간을요.
’생산자‘
그것은 노동을 담아낸 시간과 급여가 정직하게 교환되는ㅡ때에 따라 정직이 맞는지 의문이긴 하지만ㅡ노동자의 삶을 벗어난다는 의미였습니다.
처음 생산자의 길에 올라탄 것은 스마트스토어를 통해서였어요. 물리치료사 가운을 벗고 미련 없이 전공책을 정리하고서요. 일분일초를 세어가며 흘려보냈던 병원에서의 시간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였습니다. 숨은 보물을 찾듯 상품을 발굴하고, 수입통관을 진행하고, 판매를 위한 마케팅까지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렀지만, 하루가 한 시간처럼 빠르게 그리고 촘촘히 쌓여갔습니다. 더 이상 수동적으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지 않았어요. 시간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감각은 역동적이고 생기가 넘쳤거든요. 다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월 천이란 돈은 ‘누구나’에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시절, 현금이 넘쳐나고 자산가치가 치솟고, 기회만 잡으면 누구나 '대박'을 꿰차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성실’이란 가치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부의 추월차선처럼 보이던 노선을 따라 스마트스토어에서 커뮤니티 운영, 전자책 판매, 코칭 사업까지 그 범위를 넓혀가 보았지만, 누군가에겐 순탄해 보이는 부의 지름길은 제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만드는 생산물은 큰돈을 불러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요. 애초에 ’월 천‘에 도달하려면 사고방식부터 달라야 했거든요. 시간에 걸쳐 작은 사업의 모양은 바뀌었지만, 한 가지만은 끝까지 놓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게 정말 나다운 일일까?"
돈과 나다움의 교집합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매번 기울어져가는 쪽은 '나다움’이었습니다.
실험에 가깝던 작은 사업을 접고 남편의 사업을 돕게 되었을 때, 저는 ‘나다움’을 버리고 ‘돈’을 택한 선택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일상이 시무룩해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생산자로 살며 키워온 ‘나다움'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갓생으로 월 천을 벌지는 못했지만, 대신 '나다움'이라는 더 큰 자산이 남았습니다. 3~40대가 되어서까지 나다움을 논하는 것이 어찌 보면 어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갓생을 통해 발견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과 일상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업무상 엑셀을 사용할 일 없던 제가 경리 업무를 맡으며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일해야 가장 나답고 가치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갓생이 곧 부를 보장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효율적이고 오래 일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점에서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 싶어요. 지금의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생산자는 사업의 주체자만을 뜻하지 않는다고요. 자신의 일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갓생을 산다면, 그 누구라도 생산자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