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진짜 갓생
제가 갓생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지금보다 나아지고 싶다 ‘는 감정에서부터였어요. 현재의 제 모습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죠. 더 나아지고 싶었고, 더 나아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나다운 일’을 하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고 싶었어요. 온라인에서 작은 비즈니스를 시도해보기도 했어요. 당시 전 무척 들떠 있었고, 어딘가 미쳐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사실 이건 그 시절의 저를 지켜본 사람들이 ’ 지금에 와서 하는 이야긴데…‘라는 식으로 나중에서야 들려주던 말이기도 합니다. ’ 무언가 이루고 싶다면 주변에 알리지 말라 ‘는 조언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요. 이것도 이제야 제 귀에 들리는 것이지, 단꿈을 꾸던 그때의 저는 그저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꿈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때의 꿈은 원하는 만큼 이루진 못했지만, 결국 ‘마음에 드는 나‘를 만났습니다. 다만 그때 그리던 ’ 미래의 나’와는 닮은 모습이 그리 많지 않네요. ’ 나다운 일’도 ‘많은 돈‘도 아직 없고요. 그런데도 지금의 제 모습이 꽤 마음에 듭니다. 이유가 뭘까요?
흔한 말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일 거예요. 여기서 ‘있는 그대로’라는 부분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멈춰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어제와 오늘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더라도, 매일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가끔 쉬는 날이 있어도, 여전히 ’한 뼘의 성장‘을 만들고 있다는 말이거든요.
예전엔 ‘가시적인 성장을 만드는 나‘만을 편애했어요. 실패한 나, 쉼을 택한 나에겐 인정도, 여유도 없었죠.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 감정의 굴곡이 심해졌습니다.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날은 세상도, 내 역할도 모두 부정적으로 보였어요. 가끔은 집안을 책임지는 주된 구성원이라는 사실조차 억울하게 느껴졌습니다. ’조금만 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지금보다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은 아쉬움을 넘어 불만으로 이어지기도 했어요. 든든하게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이 있었기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아이가 있었기에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되어 있었던 거죠.
무엇이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아 벗어나려 애를 썼던 걸까요? ‘내 삶의 주인이 돼라 ‘는 말을 잔뜩 오해했던 것 같아요.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사는 일은 내가 사라지는 일 같았거든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족을 살피다 보면 내 역할은 평생 조연에만 머물 것 같았습니다.
억울했어요. ‘왜 나만?’이라는 질문이 계속 따라다녔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내 이름으로 성취란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건요. 그리고 여러 도전 끝에 제 이름으로 일을 만들고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비로소 주연으로 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취의 도파민 파도가 한차례 휩쓸고 나니 의심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어요.
정말 이게 내가 원하던 모습일까?
그 무렵 집안은 최소한의 손길로 겨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익숙하게 배달 음식을 대충 늘어놓은 어느 날이었어요. 문득 온기 없는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서툴지만 손수 차린 음식 앞에 모인 가족의 모습은 그 어떤 성취와 비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토록 크게 보이던 성취는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를 증명해 내기 위해 달려왔지만, 사실은 이미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때는, 세심하게 일상에 온기를 불어넣었을 때에야 가능하다는 걸요. 지금은 매일의 성취가 아니어도, 하루를 정성껏 돌보는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일상이야말로 진짜 갓생처럼 느껴지니까요. 아침에 환기를 하고 기분 좋은 음악을 배경 삼아 가족들을 깨우는 일은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하루를 시작했던 날들보다 단단한 출발임을 느낍니다. 건강한 식사로 몸과 마음을 충전하고 서로의 하루를 매만지는 시간은 그 어떤 만족감과 바꿀 수가 없고요. 이제야 비로소 성실한 온기 위에 차근히 성장을 쌓아 올리는 진짜 갓생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