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게 하는 비전보드

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은 되는대로

by 아일

자기계발서를 보면 꿈은 원대하게 가지라고 하더라고요. 이루기 어려워 보이는 막연한 미래도 종이에 매일 백 번씩 적다 보면, 어느새 이루어진다고도 하고요.

한참 무게감 없는 꿈이 둥실둥실 떠다니던 무렵, 온라인 클래스를 통해 ‘비전보드‘라는 것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루고 싶은 미래의 내 모습을 이미지로 모아보는 작업이었어요. 강사님은 꿈을 선명히 그려야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하며, 그전에 여러 질문들을 건네셨어요. 질문의 모든 방향은 ‘나‘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질문은 많았지만 답은 점점 단순해졌어요. 결국 비전보드는 나의 뿌리를 찾는 과정이자, 내 삶의 결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뿌리가 어떤 잎을 낼 수 있는지를 알아야 잎을 낼 수 있잖아요. 꿈을 꾼다는 건, 곧 나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만든 비전보드를 떠올려보면, 사실 그건 그냥 좋아 보이는 것들을 예쁘게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어요. 건강한 몸과 정신, 물질의 여유가 있는 삶, 멋진 커리어, 행복한 가족 같은 것들이죠. 교과서에 나올법한 이상적인 장면들만 잔뜩 붙여두니, 왠지 더 아득해졌습니다. 언젠가 닿을 수 있을까? 막연하기만 했죠. 매일 투두리스트를 채우며 열심히 시간을 쌓아가는 것 같았지만, 정신없이 한 해를 보내고 나면 남는 건 뿌듯함보다는 허무함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는데, 완벽한 비전보드 앞에서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걸었습니다.



비전보드를 만든 뒤 몰입의 대상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부끄럽지만 40대가 되어서도 저는 여전히 삶의 의미를 붙잡고 있었거든요. 어느 때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 같아 전문성에 집중했고, 또 어느 때는 가족을 돌보는 일이 전부처럼 느껴졌어요. 몰입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비전보드도 조금씩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그런 나를 보며 ‘나는 왜 이렇게 일관성이 없지?’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깊이가 없다는 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무엇을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만 살고 있었고, 비전보드 속의 나는 더 멀고 희미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무기력이, 내가 그리는 미래와 지금의 현실 사이의 간극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최소 5년은 쏟아야 할 것 같은 꿈들을 바라보다 보면, 순식간에 지금의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어느 날 이동진 평론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긴 시간을 인간이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그걸 세분화하면 그나마 통제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도 인생은 되는대로 흘러가더라고요. “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어요. 저에게 비전보드는 잡힐 듯 말 듯한 먼 미래를 붙잡아보려는 시도 같았거든요. 그런데 미래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루하루를 차근차근 쌓아가며 흘러가다 보면 어느 순간 도착해 있는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소박한 버킷리스트를 꿈처럼 꾸며 살고 있어요. 예전처럼 종이 한 면을 빼곡히 채우는 대신, 다이어리 앞에 사진 세 장만 붙여두었습니다. 런던 서점에서 인생책 만나기, 일 제안받는 프리워커로 살아가기, 3kg 체중감량된 건강한 몸만들기. 이 모든 건 3년을 넘기지 않는 기한이 있는 꿈입니다. 심플하고 확실한 비전보드를 만들고 나니 더 이루고 싶고,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크지 않아서 좋은 게 아니라, ‘현실과 멀지 않아서 좋은 꿈‘이더라고요.



저의 비전보드가 원래의 의도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의 이 작고 현실적인 꿈들이 저를 더 움직이게 합니다. 손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리감. 꼭 붙잡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저는 다음 점을 또 찍게 되겠죠.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미래 말이에요. 그렇게 점을 하나하나 이어가면, 분명 나만의 선이 그려질 거예요. 지금은 그 선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겠지만요. 그다음 점들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 그게 요즘은 참 궁금해요. 지금의 걸음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모습도 마음에 들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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