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겪은 이상한 이야기_21
2017년 2월 10일에 쓴 글을 재구성했습니다.
차고지 쪽에 살면 어딘가를 새벽이 나갈 때는 일찍 나갈 수 있지만,
그만큼 집에 가는 버스가 빨리 끊김.
일찍 나가는 날이 일 년에 손에 꼽을 정도인데
늦게 들어오는 날은 일주일에도 몇 번은 되기 때문에
차고지의 이점 따윈 나에게 의미가 없음.
오늘처럼 열한 시 반을 넘긴 애매한 시간에 버스를 타면
서울대 입구까지만 버스가 있고 갈아탈 버스가 다 끊기는 지라
언덕을 걸어 넘어야 하는 아주 피곤한 상황이 종종 벌어짐.
일단 언덕만 넘으면 바로 집이 있어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승차거부를 하는지라 애당초 택시는 포기했음.
그거 욕하면서 막상 걸어가려면 대충 2~30분은 걸리는 짧지 않은 거리에
그리고 그게 산을 끼고 있는 언덕임.
게다가 사람 보기 힘든 으슥한 거리라 여름에 술 깰 겸 걸을 때 말고는
그다지 내키는 걸음은 아님.
사실 여름에 술 먹고 걸으면 넘는 동안 열 군데는 모기에 뜯기지만
그건 취하면 분명히 또 객기 부리면서 걸어갈 테니 패스.
일단 오늘은 추워서 거길 걸어갈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음.
아마 오늘 같은 날은 중간에 빙판도 있을 것 같아서 거길 벌벌 떨면서 넘을 자신이 없었음.
버스에 타서 갈아탈 버스가 없으면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내가 탄 버스 앞에 그 버스 번호가 있었음.
두 버스 사이에는 승용차가 두대가 있었고
두 버스는 이 애매한 간격을 유지하며 가고 있었음.
버스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시간이 있으니
내리자마자 앞으로 뛰자! 그러고 앞의 버스로 환승을 한다면 나는 집에 곱게 갈 수 있다!
라는 무모함과 절박함이 섞인 생각이 머리를 스침.
조금이라도 간격을 줄이기 위해 앞 문쪽으로 갔고
다음 버스정류장에 서자마자 나는 앞문으로 뛰어내려 달렸음.
하지만, 이미 나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출발해버림.
정말 잠깐 그냥 그 뒤에 택시를 잡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다음 정류장까지는 평지 직선구간이고 신호등이 중간에 있는 것이 생각남.
사람이 다급하면 용감하다고 일단 뛰었음.
신호가 걸린 게 보임.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신호 바뀌고 따라온 버스에 가볍게 추월당함. 역시 나는 일개 뱁새였음.
그래도 앞에 신호등이 하나 더 있으니까 하고 계속 뜀.
사실 반 포기상태였는데 다음 정류장까지 어차피 가야 할 거라 그냥 계속 뛰었음.
신호가 하나 더 잡히고 정말 잠깐 앞섰으나 다시 추월당함.
근데 약간 차가 막히면서 뭔가 비슷하게 가기 시작함.
무슨 희망 고문당하는 것도 아니고 뛰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음.
거의 정류장에 다 와갈 무렵 배터리가 방전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들이 오기 시작함.
숨은 턱까지 차고 다리는 후달려오고 비슷했던 버스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짐.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타고나면 나는 또 놓치겠지?
무슨 혼자서 달려라 하니를 찍고 있을 무렵.
저기요!!! 손님!!! 하면서 유니폼을 입은 자매님이 나를 추월해서 지나감.
그러더니 버스를 타려는 다른 자매님을 붙들었음.
손님 핸드폰 놓고 가셨어요!!!라고 외친 자매님은 핸드폰을 건넸고
핸드폰을 받은 자매님은 일행과 함께 연신 고맙습니다를 외치며 감사해했음.
그 시간만큼 버스의 문은 늦게 닫혔고 나는 겨우 버스를 잡아탈 수 있었음.
그 뒤로는 어찌 왔는지 기억이 잘 안남.
버스에서 꺽꺽 가뿐 숨을 몰아치면서 정신 놓고 있었음.
언덕 안 넘고 곱게 집에 오려다 더 힘들게 집에 온듯함.
무튼 뱁새를 즈려밟으시던 황새 자매님께 그저 감사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