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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y 07. 2018

고양이, 순종과 폭력.


둘째날쯤으로 기억한다. 고양이에 대한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나의 마음이 ‘살의’로 돌변한 것은. 적개심으로 비화된 이 심경을 감히 ‘살의’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훨씬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때 당시의 나는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이 감정의 이름을 떠올려내지 못했다.


고양이를 떠올릴때마다 복면을 쓰고 나타나는 이 감정때문에, 나는 차라리 글쓰기에 손을 놔버렸다. 휴대폰에 증거처럼 담아놓은 몇장의 사진들을 볼때마다, 발작적인 답답함이 속을 태웠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우연히, 타인과의 대화에서 그 단어, ‘살의’를 들었을때 나는 아찔함 비슷한 것을 느꼈다. 비로소 묵은 체증이 풀리듯 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무력적 태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내가, ‘살의’라는 말을 떠올리지 못했던것도 딱히 무리는 아니었다. 살의라니. 알고는 있었지만 단한번도 나를 주어로 써본적이 없었던 단어였다.


그러니까, 오늘 말하려는 것은 다름아닌 내 가학적 감정의 잔인한 얼굴임을 고백한다.


그렇다. 나는 고양이를 죽이고 싶었다.


네코. 출처는 내 폰.


그 동물은 고양이라는 이름이 무색할만큼 사람을 잘 따랐다. 당혹스러웠다. 오히려 강아지에 더 가까워보이는 그 친근함은 둘째치고라도, 목석같은 나의 손에 머리를 비비고, 그 접촉의 기쁨에 몸을 떠는 모습에서 무조건적 복종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묘하게 눈을 맞춰오는 그 고양이가 동물 이상의 어떤 의사를 전해오는 것만 같아서 그 위화감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나는 마치 절대자와 광신도의 관계처럼 그 고양이에게 관심을 하사하기 시작했다. 동물이 사랑스러워 쓰다듬고 껴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요구에 내가 선심을 쓰는 것. 그런 모양새였다.


얼마안가 나는 그 복종이 귀찮아졌다. 그새 냉담해진 내 눈길에 대한 고양이의 반응은 더욱 맹렬한 복종이었다. 그 나약함을 인정하는 모양으로, 고양이는 몸을 뒤집고 배를 내보였다. 조명빛을 받은 동물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꼬리를 흔들고, 네 발을 허우적거리며 손길을 갈구하는 그 몸짓에서 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거부감에 휩싸였다.


내가 그를 쓰다듬지 않으면, 고양이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접촉은 내가 아니라 고양이에 의한 것이었다. 단지 내가 그의 접근을 거부하지 않은 것 만으로, 고양이는 폐를 울리는 듯 그르렁대며 호감을 표시했다. 절대적 순종. 나를 올려다보는 두 눈에는 그런것이 담겨있었다.




나는 이따금씩 발작적으로 고양이를 뿌리쳤다. 그때마다 놀란 고양이는 침대 밑으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매트리스 밑에 몸을 숨긴 채, 내 눈치를 보는 그 동물의 의사가 남김없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나 다시 가도 돼?

조금만 더 만져줘. 아주 조금이면 돼. 가만히 있을게.’


호의가 없는 상대에게 애정을 갈망하는 교태의 몸짓.

그건 비굴함이었다.


나는 그 애정의 갈구를 짓밟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연약한 몸에 폭력을 가해, 나에게서 멀리 쫓아버리고 싶었다. 나와 체온을 나눌 기대로 순수하게 빛나는 그 동물의 투명한 눈에 공포를 심어주고 싶었다.


나는 고양이가 헌납한 권력을 도구삼아, 오히려 학대자로 변질되어버린 거였다.


고양이. 중성화수술 후.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중. 곧 실외에서 키울 예정.


“이 고양이는 이름이 뭐예요?”

“없어요. 그냥 고양이예요.”


*임보가 길어져 아주 키우게 된 거라 이름을 짓지 않은것이 그대로 굳어졌다고 했다. 빈집에 하루종일 혼자 지내느라, 사람 손이 그리워서 개냥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밥 주고 모래 갈아주는 잠깐이 고양이가 누군가 다른 이를 만나는 전부였던 것이다.


혼자 보낸 시간이 수개월을 넘기는 동안, 그 동물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어쩌지 못해 매순간 쓸쓸함과 싸웠을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를 만날 기회를 잡으면 최선을 다해 혼자두지 말아달라고, 품에 안기고 털을 부비며 그 외로움을 하소연했을 것이다.  


우리가 다음에 다시 만났을때, 고양이는 더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서너 발자국의 거리를 두고, 나에게 결코 등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고양이는 그날, 나의 눈에 서렸던 살의를 감지했을 것이다. 내가 느낀 경멸을 온몸으로 깨닫고, 외로움보다 더 큰 안전을 위해 몸을 피했을 것이다.


손을 내밀어 보지만 고양이는 전같지 않다.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외면하고 돌아선다.

그를 향해 뻗은 내 손이 외로워져, 금세 다시 거두어버렸다.

고양이와 눈을 맞춰본다. 곧 고양이는 멀리 떠나버렸다.


어쩌면, 아직 내 눈속에

살의가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임보: 임시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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