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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y 08. 2018

우리 엄마를 소개합니다.

우주최강 슈퍼맨, 우리엄마 자랑.


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네다섯 살 때, 엄마는 집 근처에서 작은 호프집을 했다. 엄마가 장사를 하는동안 나는 구석 테이블 앉아 때 지난 달력 뒷면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졸리면 집으로 뛰어가 자고, 자다깨면 다시 가게로 왔다. 나의 시계에서, 엄마는 언제나 깨어있었다.

‘공 뜨기’ 부업도 했다. 엄마가 가죽공이 든 우유박스를 놓고 앉으면 나는 그 허벅지를 베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았다. 채널을 돌리다 야구중계가 나오면 '엄마 공' 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가 웃었다. 내 두 주먹보다도 큰 야구공이 빨간 실로 여며져 하나가득 쌓이면 그것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엄마는 또 한무더기의 가죽공들을 가져왔다. 엄마는 그 일을 꽤 오래 했다.

엄마가 부업으로 모은 돈은 살림 외의 일들에 쓰였던 것 같다. 일테면 우리 남매를 위한 깜짝선물 같은거였는데, 동화 읽기를 좋아했던 나를 위한 이벤트로, 소공녀의 빨간 구두를 준비한거였다. 책상 밑에 얌전히 놓인 그 구두를 보고, 나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구두를 끌어안고 펑펑 울어버렸다. 여섯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동이었다.


대충 요런 느낌. 네이버에 ‘어린이구두’ 검색함.


내가 조금 더 자라 유치원을 다닐때쯤 우리는 조금 더 큰 동네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이제 작은 슈퍼를 열었고, 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가게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엄마가 나를 기다리는게 너무 좋아서, 행여나 손님이 있어 마중을 나오지 못할까봐 마음을 졸이곤 했다. 조마조마한 시간이 지나면 엄마는 그림처럼 항상 그 자리에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집이 따로 있었음에도 우리 가족은 주로 가게 안에 있는 골방에서 잠을 잤다. 넷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은데다, 이따금씩 주먹만한 쥐가 출현하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은 살을 맞대고 잠드는 그 좁은 방을 더 편안해 했던 것 같다.

아빠는 돌고래모양의 로고를 쓰는 제조업회사에 다녔는데, 밤늦도록 술을 마신다거나 외박을 해서 엄마의 걱정을 사는 일이 없는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연락도 없이 밤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근무 중 사고였다.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을 엄마는 끝내 아빠에게 화를 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 8살의 나는 소복을 입고 오열하는 엄마를 보고 겁에 질려 삼촌의 뒤로 숨었고, 아빠를 찾으며 우는 오빠를 따라 영문도 모르고 서럽게 울었다.

우리 식구는 그렇게 세 가족이 되었다.


네이버에 ‘죽음’ 검색함. 아놔 이렇게라도 써야되는거 맞는건가 =_=


미망인이 된 엄마의 인생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슈퍼는 이제 가족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고, 쉬엄쉬엄 소일거리로 해왔던 부업은 이제 엄마의 24시간을 지배했다. 슈퍼 안의 골방, 아빠가 있었던 자리에는 이제 예의 그 가죽공들이 놓이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슈퍼를 접고 도배 일을 시작했다. 새벽같이 나갔다가 밤 늦게야 돌아오기가 다반사여서, 엄마는 이제 더이상 나를 배웅할 수도 마중나올 수도 없게 되었다. 아쉬움에 투정을 부린 나에게 엄마가 그랬다.

“그런건 이제 엄마는 못해주는거야.”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아홉살 이었다.


지쳐 잠들었다가도 우리의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면 엄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일어났다. 고깃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어 푸짐한 밥상을 차려내면, 남매는 고마운줄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다. 철없는 남매는 엄마의 휴식을 배려할줄 몰랐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엄마는 인근 골프장에 조리사로 취직했다. 학자금을 100% 지원해주는 곳이었다. 성수기때는 잠도 몇 시간 못자고 일하면서도 엄마는 거길 꽤 오래 다녔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엄마가 습관처럼 자주 했던 이 말을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아주 잊은줄 알았던 이 말은 이따금씩 튀어나와 사춘기의 반항심을 부풀리고 억누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엄마를 참 많이도 힘들게 했다.
  
여러 직장을 거치며, 근 10년 간 혹사당한 엄마의 몸은 성한 곳이 없게 되었다. 엄마는 우리 남매가 자라는 속도보다 빠르게 늙어갔다. 마흔 초입인 엄마의 손이 워낙 거칠고 억세서, 나는 나를 쓰다듬고 내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엄마의 손길을 아프다며 거부하곤 했다.

아니, 사실 엄마는 나를 칭찬하거나 내 교복 치마 끝자락에 달린 실밥을 잘라내 줄 시간이 없었다.
내가 돌아오는 길을 지키고 서 있던 나의 울타리는
예전에 허물어졌다.


이쁜 우리엄마. 이거 나쁘게쓰면 지구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릴거야.


오빠가 군 입대를 하면서 이제 집에는 엄마와 나, 두 사람 만이 남게 되었다. 길게 뻗은 콧대며 잘생긴 눈이 아빠를 꼭 빼닮은 오빠를 두고 돌아오면서 엄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집으로 빗물에 푹 젖은 소포가 도착했다. 논산에서 온 그 소포에는 입소하던 날 오빠가 입었던 옷가지가 들어있었다.

그날, 엄마가 많이 울었다.
흙탕물에 절은 옷을 끌어안고 오래도록 울었다.



이제 오빠도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까지 잡아, 이제 당신이 할 일은 다 했다며 한 시름 덜었다면서도 엄마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우리남매 시집장가가서 손자를 보면 용돈이라도 줘야 체면이 선다면서.

엄마의 늙은 얼굴을 보며 참 박복하다고 말했다.
운도 지지리 없고, 참 힘들게 살았다고 그랬다.

 "나는 행복해. 만약에 아빠가 살아계셨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풍족하게 살고 있겠지. 그래도 엄마는 너희가 이렇게 착하게 자라주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해. 너희 결혼할 때 오빠 집 해주고, 너 시집갈 것도 다 마련해놨어.
나는 다 했어. 다 이뤘어. 나중에 아빠 만나도 떳떳해."

남매 뒷바라지에 젊은 날을 다 보내버린 우리 엄마,
이제 좀 쉬려니까 딸 때문에 속이 썩는 우리 엄마,

언제나 자식 걱정에 안절부절 못하는 우리 엄마,

아빠 몫까지 두배로 해내야 했던 우리 엄마.


나 낳고 키우느라 고생 많았어.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도 분명 있었을텐데.

나 포기하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쭉 행복하게 살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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