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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y 11. 2018

헤어졌다. 내 마지막일줄 알았는데.


헤어졌다. 정말 우연히 만나, 난생처음 내가 대시한 사람이었다. 짧았던 육개월간의 연애는 첫 싸움을 계기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이렇게 가벼운 사이였던가. 같은 문제의 반복, 지치고 지쳐 처음으로 악을 쓴 통화에서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이별을 고했다.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대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당신이 하는 말들이,

나에게 전혀 데미지를 주지 못하네요.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것 같아요.”



온도차가 극명한 몇문장의 말에, 나의 흥분도 깨끗하게 증발해버렸다. “그럼 헤어져야겠네.” 내뱉듯 중얼거린 말에 남자가 응수했다. “네.”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탓이었다. 끊자마자 후회가 몰려왔다.


냉담한 상대의 반응에 놀라 반사적으로 그렇게 했을 뿐, 나는 이 이별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별안간 닥친 이 상황에 눈물도, 화도 나지 않았다.



길었던 연애공백기 동안 연애를 글로 익힌 사람답게, 나는 이별 후 대처방식이 매뉴얼화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별경험의 부재에 따라, 내 감정을 흔드는 여러 상황에 적절히 변용되어 쓰였다. 나는 불필요한 고민에 마음 졸이느라 누워자빠져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불행을 맞아 멍청하게 굴지 않기’ 같은것은 나에겐 너무 쉬운 일이었다.


당일 밤, 무신경한 얼굴로 하나하나 그의 존재를 지워나갔다. 집에 있는 그의 물건들은 박스에 넣어 치웠고, 휴대폰에 가득한 그의 사진들과 공유앨범을 지웠다. 장거리 연애를 이어줬던 영상통화의 순간들을 찍은 스크린샷이 여전히 나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꼬박 한시간이 걸렸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되는 데에.


테이프까지 붙여 택배보낼 준비를 마친 그사람의 박스는 적어도 세번 이상 다시 열렸다. 다 챙겼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여지없이 예상치못한 곳에서 또다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렇게, 느닷없이 나타나 조롱하듯 인사하겠지. 양말뭉치, 엽서 따위에서 모락모락 피어날 그의 잔상이 두려워서 나는 최대한 열심히 집을 뒤졌다. 괜찮지 않을 그 순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나는 꽤 담담하게, 나답게 잘 해나가고 있었다.

친한 이와 메시지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뭔가에 놀라 잠이 깬 새벽, 그제서야 깨달았다.

쓰나미를 앞둔 바다가 잔잔하듯 나는 폭풍전야의 고요한 밤을 보냈고, 이별의 해일은 이제부터 몰아칠거라는걸.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2018.05.09. 헤어진지 8시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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