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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r 18. 2018

부모의 은혜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고등학교를 채 나오지 못한 우리엄마는 형제가 많은 여느 집 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빠와 남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양보하고 일찍부터 일을 시작해 돈을 벌었다.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를 짓고 외우던 문학도의 꿈이 좌절되고, 만학의 목표가 결혼으로 대체된 데는 모두 어쩔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 고단한 사정들은 엄마가 당장의 일을 억지로 하는데에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형제들에게 박탈당한 배움의 기회를 탓하며 시인의 꿈을 버렸을 것이고,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아내이자 엄마의 삶에 적응했을 것이다.

‘하고싶은 일’ 같은 것은 예고없이 터진 폭탄같은 일상에 밀려 영영 멀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허리춤에도 못 오던 어린 아이가 청년으로 자라나는 동안 엄마는 육십의 눈이 흐린 중년이 되었다. 일생을 가족의 생계에 바친 것은 결코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지만, 엄마는 빚 없이 두 아이와 삶을 꾸려온 것을 표창처럼 여겼다.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비축하고 아끼는 것, 엄마가 몸소 증명해 낸 삶의 진리였다.

퇴사한 지 두 달, 엄마가 점을 보고 왔다. 그런데엔 통 취미가 없는 엄마는 근심 끝에 친구를 따라 나섰을 것이다. 점쟁이는 좋은 말을 해준 듯 했다. 엄마가 메시지를 보내와 딸 덕에 호강할 팔자라며 좋은 기색을 했다. 잠잠한 평화는 딱 일주일간 지속되었다.

집에를 좀 들리라던 엄마는 상황이 여의치 않자 전화로 할말을 대신했다. 좋은 점괘니 뭐니 다 필요없다며 타는 속을 털어놓았다. 내가 그랬고 네 오빠가 그렇듯, 가족과 미래를 생각해 일을 하고 돈을 벌라고 타이르듯 말했다. 하고싶은 일은 나중에 하라고 했다.

걱정안하게끔 알아서 잘 하겠다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후로 한동안 엄마를 피했다.

나는 엄마의 희생에 같은 희생으로 보답할 의무가 없다.
꿈꾸었다는 사실마저 유적같은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 엄마는 당신이 포기한 것을 나에게 강요할 권리가 없다.

내 꿈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오직 나뿐일거라고.
나는 내 자유에 입각해 내 삶을 낭비할 권리가 있다.

엄마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에게 대항해 내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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