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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Feb 24. 2022

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5

당장의 안락함에 속지 않게 하옵시며, 무엇보다도 나를 믿고


 에니어그램의 사고중심 유형들은 머릿속 걱정거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현실과 상상속에서 끊임없이 걱정거리를 만들어내고 불안을 가중한다.


 이중에서도 '불안'요소에 특별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유형이 6번이다. 6번은 그야말로 걱정선수다. 같은 사고중심에 속한 5번이나 7번에 비해서도 이 생각의 족쇄에 더 매여있어서, 담당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각의 브레이크와 액셀을 동시에 밟고 있는' 것과 같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니, 나아가질 못하는거다. 


 쓸데없는 걱정같은 건 애당초 안하면 그만일텐데, '갑자기 내 옆을 지나던 트럭이 엔진과열로 폭발해 큰 불이나고, 내가 거기에 휘말리면 어떡하지' 같은 불필요한 걱정을 만들어내서 한다. 6번은 미래에 닥쳐올 예기치 못할 모든 일들이 두렵기만 하다.



https://namu.wiki/w/불안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야하기에, 6번의 생존욕구는 수시로 몸을 옥죄어 오는 이 불안심리에 맞서 나를 보호할 은신처를 찾아나선다. 신뢰할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나 조직처럼, 정신적 물리적으로 나를 비호하고 감싸줄 동료들을 찾고 그 속에 안전하게 몸을 숨기는 방법으로.


 이에따라, 6번은 태생적으로 무리에 속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되었다. 일단 한번 무리에 들어가면 조직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이 남달라서, 구성원들이 굳건하게 잘 뭉치도록 조직을 정비하는 것에도 열과 성을 다한다. 6번이 엄마, 또는 군기반장의 역할을 맡게 되는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조직이 받는 위협은 곧 내 안전에 대한 위협이 되므로, 조직의 안녕 역시 6번이 크게 신경쓰는 부분이다. 누가 날 욕하는건 참아도 내 친구, 내 가족을 욕하는 건 절대 못참는다. (그렇다고 뛰쳐나가 상대에게 싸움을 걸진 못하겠지만)


 6번을 이야기할때 중점적으로 보아야할 또 한가지는 그의 우유부단함이다. 앞서 말한것처럼 불안요소에 대한 두려움이 큰 특성 탓에, 결정권을 손에 쥐는 일에 큰 부담을 느낀다. 편차는 있겠지만 평균적인 6번들은 (일의 경중을 떠나)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한다. 믿을만한 이들에게 '내 생각은 이런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하고 자기 판단을 확인받아야 안심이 된달까.





'더 이상 남편과 섹스하고 싶지 않다'


 사랑의 여부를 판별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단 하나의 여지도 없이 확실한 기준으로, 그와 몸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떤 스킨십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이렇게 룸메이트로만 살면 어떨까. 그것도 나쁜 삶은 아니지 않을까.


 어정쩡한 동거인으로 살면서 언제는 아내였다가 또 언제는 룸메이트로 역할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던 시기가 지나자 내게도 온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대외적으로는 부부 타이틀을 유지하되,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철저히 각자 살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맞이한 셰어하우스의 삶은 이혼의 부산물이라 보기엔 너무나 안락했다. X는 새벽녘에나 귀가하고, 다음날 아침 내가 출근할 때까지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나는 퇴근 후부터 잠들기까지 넓은 집을 독점하고 강아지 보리와 여가를 즐겼다. 행복하다고 느꼈다. X에게 집착하지 않고, 오롯이 나의 시간을 사는 일은 과거의 싱글라이프를 떠올리게 했다.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고, 할일들을 착착 해나가는 주체적인 삶.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평화로운 날들.


 그러니  평화는  고문에 가까웠다.  집에서 누리는 시간이 못견디게 즐거울수록, 호기롭게 선언한 이혼은 후회가 되어 6 여자의 마음을 제멋대로 헤집어놓았다.





'그냥 이혼 하지말자고 할까.  뭐라고 하면 그냥 마음이 변했다고 시치미뗄까.'



 누구에게도 묻지않고, 지극히 안정된 상태에서 득도의 순간처럼 개운하게 결정했던 이혼이다. 어느때보다도 흔들림없이, 조금의 불안과 의심도 없이 X에게 내 결정을 전했었다. 그때의 강건한 마음가짐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걸까. 여느때처럼 6번의 본능 속 그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는걸까.


 타협. 삶의 큰 균열을 피하고 싶은 마음. 의연히 맞섰지만 사실은 두려운 이혼녀 타이틀. 용감했던 내가 완전히 물리쳤다고 믿었던 그 두려움은 사실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또아리를 틀고있었다. 그리고 방심한 사이에 다시 거대하게 덩치를 키우고 말았다.


 두려움은 회의를 불러온다. 나는 이혼이 정말 내게 이로운 일이 맞는지 재차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이혼해서 혼자 잘 살수 있어? 그냥 쇼윈도 부부로 살면 되잖아? 위자료도 안 준다며? 너 지금 몇살인지 알고는 있지? 나이들어서는 혼자 어떻게 살려고? 집은? 차는?


 혼란한 마음으로 시선을 돌리자 네 다리를 쭉 뻗고 단잠에 빠져든 강아지가 보인다. 그 뒤로 전면의 큰 창을 통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싱그러운 여름 풍경. 층고가 높아 개방감이 좋은 집, 여유로운 전원의 삶, 자율성은 없더라도 시가에 얹혀가면 얼마간은 더 누릴 수 있을 경제적 안정. 나는 정말 이걸 다 포기하고 굳이 개고생을 하겠다는거지? 이혼녀가 되어서?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감히 혼자 중대한 결정을 내린 대가는 크다. 나는 괴롭다. 무엇도 혼자 결정하길 두려워하던 내가, 하필이면 혼자 결정한 것이 무려 이혼이라니.







 기특하게도, 이 6번 여자는 순간의 기분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이 이혼을 결정했던 이유들을 떠올려냈다. 그리고 안정을 되찾았다.


 잊지마. 지금의 이 평화는 마약같은거야. 이 집은 나를 주저앉게 하고, 내가 할수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어. 나는 처절하게 혼자였고, 이 집은 나를 방치하는 구실이었어.

 나는 내 결정을 믿고 이 환경에서 나를 구할거야. 나를 사랑하고 아껴줄 사람과 함께 행복을 만들어갈거야.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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