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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Feb 16. 2022

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4

이혼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다



 삶에 대한 운명론적 태도는 일이 잘풀리건 안풀리건 그 결과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면에서 효과적인 자위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때문에 수동적으로 삶을 방관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성공적으로 잘 마친 일에 "역시, 잘 될 운명이었어!" 하는 것이나, 망쳐버린 일에 "어쩐지, 전부터 느낌이 쎄하더라니까." 하는 말은, 많든적든 거기에 쏟은 시간과 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절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어도 내가 행위자로 참여했다면 모든 결과는 운명 따위가 아니라, 오직  행위의 결과로써만 의미를 가져야 한다. 나는 성인이고, 이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혼은 이 행위의 주체인 나 스스로의 의지로 이룬 결과이며, 그렇기에 나는 담담하게 결혼의 실패를 인정할 수 있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의 발생에 관여한 작은 퍼즐 조각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시어머니가 큰 병에 걸린 것.

그것으로 동물들을 옮길 필요가 생긴 것.

X의 잦은 새벽귀가로 각방살이를 하게된 것.

내가 취직해 돈을 벌게 된 것.

내가 친구를 사귀고 사회생활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



 이 모든 요소들과 거기에 따른 각각의 선택이 결심의 토대가 되었다. 결국 이혼이란 무수한 우연에 당사자의 선택이 작용한 결과물이다. 특별한 이혼, 특별한 실패는 없다. 살면서 거치는 무수한 실패들에 각각 고유한 의미를 붙이려 한다면 인간은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이혼은 실패가 맞다. 결혼한 모두가 절반의 확률로 맞이하는 그저그런 실패 중 하나일 뿐이다.





 많은 연인들이 그렇듯, 우리 부부도 서로의 휴대폰에 상대가 정한 애칭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X의 애칭은-이걸 애칭이라 하기엔 논란이 있겠지만- '룸메이트' 였다. 훨씬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름을 부여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생각할 때 이것보다 우리의 관계를 더 정확하게 묘사할 이름이 없었다.


 싸움의 반복으로 X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면, 이 이름은 가끔 그의 본명 OOO로 바뀌며 내 의식속에서 더 멀리 추방되었다가 마음이 좀 풀리면 다시 룸메이트로 돌아오곤 했다. X는 뭐가됐건 개의치 않았다.


 이혼에 구두 합의한 날로부터 우리는 동거인이 되었다. 나는 2층을, X는 1층 방을 쓰면서 침실을 분리했는데, 셰어하우스라는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우습게도, 그에게 부여해 쓰던 '룸메이트'라는 별칭이 하우스메이트의 형태로 현실이 된 거다.





 1인 가족이 되어 나만의 일상을 되찾는 일은 주말 아침의 커피 한 잔 만큼이나 달콤했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고민거리는 있었다. 크루아상을 굽고 커피를 내릴 때에 X의 몫을 같이 준비해야 하는지, 아직 자는 것 같은 X를 깨워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언젠가 한번, X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 망설임 없이 본인만의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 고민을 그만두었다. 내가 참 바보같이 느껴졌다.



"우리가 이제 그런 사이는 아니죠."



 넷플릭스를 켜놓고 소파에 앉았던 주말 저녁, 영화를 같이 보겠냐고 제안했다가 칼같은 거절에 무안해졌다. 내 실수다. 우리는 이제 그런 사이가 아니다.


 그는 아무말 없이 현관을 나선다. 원래도 외출할때 정겨운 인사를 나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눈앞에서 투명인간이 된 기분은 혼자남은 정적만큼이나 깊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창밖으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차를 보면서, 설마 또 한 번 이혼을 번복하고 싶은 건지 자문했다. 나는 이 사람과 계속 살고 싶은가.


 살아가며 배운 거지만, 사랑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졌다. 언어적 표현과 끈적한 에로스 외에도 사랑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렇다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모호한 모습의 사랑이 우리 사이에 남아있진 않은가. 그래서 내가 영화를 제안한 걸까. 나는 혹시, 아직 X를 사랑하는 걸까.






메인이미지 출처:  : https://burnerlaw.com/changing-your-will-in-the-middle-of-a-divo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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