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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r 26. 2022

엄마의 연애

지지는 하는데 불편해서.



 지난 금요일, 엄마가 다녀갔다. 김포에서 남해까지 넉넉히 편도 6시간은 걸리는 장거리다.


 보통 엄마가 온다고 하면 짧으면 일주일, 멀게는 2 전부터 미리 일정을 정하는데 이번엔 하루 전인 목요일 밤에 갑자기 카톡 통보를 받았다. 난 심지어 그걸 술에 쩔어서 자느라 읽씹했다.(...)


 숙취에 시달리며 금요일을 꾸역꾸역 버티다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내려가는 중이며, 대전쯤 왔다고 했다. 그때 전화 너머로 낯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만난지 1년쯤 된것 같은 엄마의 남자친구였다.





 나도 그렇지만, 엄마 나이쯤 되면 특히나 사별이든 이혼이든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된 사람들이 많아서, 내 세대가 쓰는 카톡 오픈채팅같은 모양으로 네이버 밴드를 한다고 했다. (뭐 '58년 개띠 모임' 같은거겠지)


 채팅방에서 정모하듯 일정과 인원을 조율해 여럿이서 만나고 하는 모양인데, 거기서 우리 박여사가 꽤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그럴만도 하지. 이쁜데다 재산있고 자식 다 보내놨으니 걸릴것도 없고.


 대충 보이겠지만 나는 엄마의 연애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편인데, 막상 내가 이런 의사를 대놓고 말하면 박여사가 오히려 움츠러든다.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이 미안함은 역사가 무척 오랜거라 거슬러가면 중학교때까지 가야하는데, 그건 박여사 개인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넘어가도록 한다. 오늘은 지금 만나는 아저씨 얘기만 해야겠다. 그게 페어플레이인거 같아.




 

 수요일쯤, 아저씨한테 문자가 왔었다. 천혜향을 한박스 보낼건데, 주소를 잃어버렸으니 다시한번 찍어달라고 하셨다. 원래같으면 펄쩍 뛰면서 거절했겠지만 (괜찮아요!! 아니, 진짜 제발, 괜찮아요!!) 몇달 간 겪어본 아저씨는 고집이 무척 세서, 주소를 안 찍어주면 전화를 하실 분이다.


사양과 고집이 오가며 진을 빼는게 더 귀찮아서 냉큼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주소를 보내버렸다. 아저씨와 첫 대면 이후 8개월쯤 됐다. 이제 문자정도라면 이정도는 능숙하다 할만큼 낯이 두꺼워졌다.


 아저씨는 내가 이혼해 이삿짐을 옮기던 날에도 나를 챙겨주셨다. 운전이 서툰 엄마가 혼자 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차 없이 내려와 내게 부담을 주지도 못할 노릇이라 곤란하던 때에 아저씨가 선뜻 나서준거다.


 시가 사람들이 나혼자 무거운 짐들을 낑낑대며 나르는걸 방관하는 동안 아저씨는 내 편이 되어 손수 짐을 나르고 운전도 해주셨다. 나는 그 상황이 참 싫었다. 혼자 할 수 있었다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요청했을거다. 아저씨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분이 내게 잘해주는것과 완전히 별개로, 나는 그 사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왜그런지 모르겠다. 말이야 바른말로, 아저씨가 있어서 편하고 좋은게 훨씬 많은데. 불효막심한 딸이 엄마랑 만날 싸우기나 하고, 엄마 보러 잘 가지도 않고. 막상 가면 술퍼먹고 외박하고 놀다가 홀랑 다시 남해 내려가 버리니 딸이라고 하나 있는게 없는것만 못하니까. (막장) 아저씨가 엄마 말동무도 되어주고, 같이 놀아주니 얼마나 고마워. 심지어 필요할때 이렇게 도움도 많이 주시는데. (막막장)


 나는 설마, 애처럼 엄마를 뺏기는 기분이라 아저씨가 싫은 걸까. 아저씨한테 도움을 받으면 꼭 뇌물 받은 모양으로 네가 나를 도왔으니, 엄마 만나는걸 허하겠노라, 해야 하는것 같아서? 그러다 언젠가 아저씨를 아빠라고 불러야 될까봐?

 아니, 잠깐만 용치야 너 엄마 재혼하는 거 찬성이라며?


 


 

 어제 금요일, 남해는 날씨가 엄청 궂었다. 바람이 거세고 비도 많이 내려 운전하기 엄청 고되셨을거다. 일곱시 반이 넘어서야 주차장에 도착한 엄마는 바리바리 싸온 엄마표 반찬들을 끌러 냉장고에 넣었다.


 아저씨는 의자에 앉아서 내게 안부를 묻고, 나는 최대한의 서비스 정신으로 살갑게 대답을 하는데 뭔가 자꾸 아슬아슬하다. 이 질문이 끝나면 내가 질문을 해야하나. 궁금한게 없는데 어쩌지. 내가 무엇을 궁금해 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실거냐고? 어디서 잘거냐고? 엄마랑 뭐할거냐고? 세상에 맙소사. 그딴걸 질문이라고?


 결국 나는 비겁해지기를 선택했다. 감사하게도 어제부터 안하고 쌓아뒀던 설거지거리가 꽤 있었다. 엄마는 빈 반찬통을 찾아 집을 뒤지고, 나는 설거지를 하고, 아저씨는 의자에 앉아있고. 모녀가 내는 생활소음이 이 공간에 울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나는 물을 겁나 틀었다. 제발, 이 어색함을 어떻게 하냐고요!


엄마와 내가 각자 맡은 일을 다 끝내고 나자, 아저씨는 서울로 보낼 짐들을 챙겨 먼저 나가셨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 이제 가시는 거구나. 이렇게? 이렇게 빨리?


엄마는 집에 와서 반찬정리만 하다가 엉덩이 한번 못 붙여보고, 화장실 한번 갔다가 그대로 남해를 떠났다.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엄마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무슨 감정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가 허둥지둥 반찬을 정리하고 바쁘게 집을 나서는거나, 아저씨가 그렇게 홀랑 나가버리신 그 모양새가 정말 어지간히 불편하셨던 것 같아서 나도 벌써 가? 같은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그래도 두어달 만에 본 엄마와 고작 15분만에 다시 헤어졌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마침 전화온 친구한테 엄마가 왔다갔다고 말했더니, 친구가 "네?? 왔다 가셨다고요?? 뭐 어디 10분거리 사시는 줄." 이라고 말했다. 웃으며 긍정했지만 뒷맛이 썼다.


 그 밤, 바람은 좀체 잦아들지 않았고, 비도 그치지 않았다. 이 비를 뚫고 운전하고 계시겠지. 차 한잔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마음이 날씨만큼 우중충했다.








메인이미지 출처: https://www.jfdperfsolutions.com/stuck/




+라이킷은 항상 감사합니다 :)

+비구름도 다 가고, 날씨가 맑아졌네요. 저는 좀전에 엄마랑 전화하며 화해 비슷한걸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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