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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Apr 04. 2022

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13

따지고보면 다 별일 아니야(1)



 가구이사는 오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새집에 가서 정리와 청소를 하는동안, X가 나 대신 업체 오퍼레이팅을 맡아주기로 했다. 시간 맞춰 가구를 받고, 이후에 다시는 이 집에 오지 않으려면 오전중에 두어번은 더 왔다갔다 해야할 듯 싶었다.


 이번 이사는 가구를 그 브랜드업체에서 맡다보니 큰짐이랄게 스타일러와 암체어 하나 뿐이었다. 그거 옮기자고 용달차 부르기엔 돈이 아까워서 가구업체랑 조율을 좀 해보려고 했는데, 트럭에 내 짐만 실리는게 아니라서 여유공간이 없다고 칼거절당했다. 결국 용달에 스타일러 하나에 옷상자 두어개만 옮기는걸로 싸게 쇼부를(?) 쳤다. 나머지 짐은 다 내가 손수 옮긴다.




 

 나는 친하고 자시고를 떠나 남한테 부탁하는걸 정말 어려워한다. 부탁의 말을 고민할 사이에 그냥 혼자한다. 쉬우면 혼자 후딱 해치우고, 힘들면 힘든대로 천천히 해나간다. 뭐, 이사하고 하루이틀 아픈게 대수겠어. 등산가고 자전거 타면서 사서고생도 하는 마당에.


다만 간과한 것이 몇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생각보다 내 짐이 정말 많다는 것. 또 하나는 매번 열고 닫아야 하는 1층 현관의 도어락이었다. 차에서 내린 짐을 엘리베이터 앞으로 옮기면 될 것을 현관앞에서 한번 내려야 하니 단계가 하나 늘어나는 거다. (도어락 끄는법을 몰랐다. 알았어도 안닿아서 못 껐겠지만)


 살림살이를 트렁크에서 내려 건물 현관앞에 옮기는게 1, 그걸 엘리베이터 앞으로 옮기는게 2, 다시 엘리베이터 안에 싣는게 3, 올라가모든 짐을 다시 엘리베이터 밖으로 빼는게 4, 도어락 열고  안으로 짐을 들이는게 5.

 여기에 이 모든걸 최대한 민폐없게, 그리고 신속하게 끝내야 하는 옵션도 추가.




 

 시가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짐들을 챙기고 있을 무렵 엄마의 연락을 받았다. 집 근처라고 했다. 얼른 가서 문을 열고 청소며 이삿짐 받을 준비를 해야한다. 마음이 급해져 얼른 졸고있던 보리를 품에 안아들었다. 마지막으로 집을 둘러본다. 문득 벽에 걸린 웨딩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과 똑같은 레퍼토리로 찍는 웨딩스냅이 싫어 우리 둘이서 찍고 셀렉했던 거였다. 하얀 원피스도 여러벌 사서 입었고, 근처 카페에서 부케용 조화도 빌렸었지. 그날은 우리 말고도 촬영하는 팀들이 있었는데. 좀 재밌었는데. 뭐, 의미없다. 알아서 버리겠지.

 

 대부분의 준비를 다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사 당일이 되니 그간의 이사준비라는게 얼마나 허술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안 신는 양말이나 스타킹들을 버렸어야 했는데, X의 속옷, 양말따위와 제멋대로 섞여있는 통에 그걸 나눠 버릴 짬을 못 냈다. 시간이 없다. 투명한 비닐에 담아 한 켠에 두고 급히 집을 나섰다.





 뭐든 서두르다 일이 터지는 법이다. 짐 좀 편하게 옮겨보겠다고 서툰 후진주차를 한 것 부터가 문제였다. 내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 본가에서 나와보신 시어머니가 길을 봐주셨는데, 그것도 안보고 마음만 급해서 차를 빼다가 둔덕 밑으로 오른쪽 앞바퀴가 푹 빠져버렸다. 신이시여. 하필 지금요?


 조금 있으니 시아버지도 나타나셨다. 차 상황을 살펴보시더니, 이대로 계속 시도하면 차가 망가진다고 잠시 쉬면서 일단 X에게 연락하라 하셨다. 이혼결정 후 거의 마주친 적도(피한거겠지만), 대화를 나눠본 적도(역시 피한거겠지만) 없었던 시아버지다.


 하필이면 지금 일을 친 나도 원망스럽고 하늘도 원망스러웠다. 아 정말 이러기냐. 이렇게 꼬인다고? 어쩔 수 없이 X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 설명을 했다.




"그랬구나, 많이 놀랐겠어요. 일단 숨좀 고르고, 잠시 좀 쉬고 있어요. 내가 렉카 보낼게요."





 오랜만에 듣는 따뜻한 말에 왠지 울컥했던 것 같다. 기운이 쭉 빠져 맨 땅에 털퍽 앉아버렸다. 갑자기 이게 다 뭐하는 건가 싶고, 해야만 하는 모든 일들이 버겁게 느껴진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나? 나 지금 진창으로 들어가고 있는건가? 이걸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나?


 뜨거운 여름햇살 아래, 마당에 풀어 놓은 보리는 신이나서 뛰놀고 있고, 나는 울긋불긋 곰팡이 핀 설기같은 꼴을 하고서 멍하니 앉아있다.


 나의 세상이 무너지는 가운데, 유일한 가족인 보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다는게 허탈하기도 하고, 웃음도 났다. 수십년 전 아빠의 초상을 치르던 그때, 상복을 입고 우리 남매가 노는 모습을 봤을 엄마의 마음이 지금 나와 같았을까.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보리를 쳐다보고 있는데 X에게 전화가 왔다. 곧 렉카가 가니,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한숨 돌린다. 이사는 문제없이 끝낼 수 있게 되었다. 기운 차리자. 별일 아니야. 단순 해프닝이야. 덕분에 잠시 쉬는거지.


 곁에 서 계시던 시어머니에게 상황을 전했다. 곧 렉카가 온대요. 신경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날 더운데 서 계시지 말고 들어가세요. 가만히 보고있던 시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호흡이 가빠지더니, 이내 울기 시작했다.




 "힘들면 그냥 도와달라고 하지, 무슨 애가 그렇게 독해서 다 혼자해. 엄마 여기 있는데 그냥 좀 해달라고 하면 되지. 네까짓게 무슨 힘이 있다고 악을 쓰고 해서 사람 속을 다 뒤집어 놓고."



시어머니의 우는 모습을 본다. 내게 참 많이 상처주셨지만, 그것보다는 그저 아들 사랑이 각별해 벌어진 일임을 안다. 본인이 그만큼 상처받아 내게 매정하게 구신것도 다 안다. 혼자 시골에 와서 외로워하며 사는 나를 많이 아끼고 애처로워 하셨던 것도, 아들 성격을 당신 자신이 더 잘 알아서 내가 외로움 덜 느끼고 살도록 도와주시려 애쓰신 것도 다 안다.


 오늘만 버티면 된다. 오늘로 끝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일에 투정을 섞지 않는다. 많이 당황스럽고 힘들고, 두렵지만 다 이겨내야 할 것들이다. 나는 할 수 있다. 이혼이 누군가의 도움을 전제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애초에 안했을거야. 그러니까 약해지면 안돼. 무너지면 안돼. 별일 아니야. 다 그냥 지나가는거야.

 아직은 울지 않는다. 이겨내면 그뿐이다.






+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라이킷은 용치에게 희망과 격려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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