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치 Apr 02. 2022

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12

이삿짐 싸는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삿짐을 한번 싸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갖고있는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뭔놈의 잡동사니가 이렇게 많은지 미련이 남아 버리지는 못하고 이사 다닐적마다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것들만 한 트럭이다.


 사람의 축적욕구는 불안감에서 촉발한다.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줄만한 것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안정감을 확보하는거다. 이삿짐을 싸는 내 속도 다르지 않았다. 뭐든 필요해질 상황을 상정하면서 적어도 내가 샀거나, 암묵적으로 내 소유인 물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싹싹 긁어 가방에 담았다.


 이사일이 한손에 꼽을 수 있을만큼 가까워오자 X는 더욱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왔다. 덕분에 이삿짐을 싸면서 마음상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지만, 짐이 빠지고 나서 휑해진 집을 본 X가 '정말 다 쓸어간다' 비슷한 말을 했던것도 같다.


 다른 부부들은 세간 가지고도 마찰을 빚는다던데, 우리의 경우 그런일은 없었다. 어쩌면 하루하루 늘어나는 내 짐과, 그에 반비례해 비어가는 집을 보면서 기분은 상했더라도 싸우는걸 싫어하는 그의 성격 상 차라리 외면했을 수도 있고.


내 돈주고 -부부 사이에 네돈 내돈이 어디있냐싶다만- 산 것들만 엄선해 챙기는데도, X가 너무 신경을 안쓰니까 왠지 도둑질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 영 찜찜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때 내 알러지는 극도로 심한 상태였다. 뭘 먹기만 하면 온몸에 붉은 반점이 올라왔다. 물 빼곤 아무것도 마음편히 먹을 수가 없었다.


 원래 병증이라는게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보다 눈에 극명하게 보이면 더 큰 공감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온몸이 얼룩덜룩 빨갛게 물들어서는 징징대는 말 하나 없이 이사와 크루일, 회사일을 다 쳐내는 나를 보고 주위의 걱정을 많이 샀던 것 같다. 투사같았으려나. 좀 멋있었나.


 

 사실 진짜 문제는 본가였다. 본가 신혼방에 있는 큰 가구들을 이사때 다 분해해 옮길 수 있으려면 그 안에 든 것들을 다 빼두어야 했는데, 몇번인가 시어머니가 위협적 언동을 하신 이후로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주치기만 해도 자꾸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마주치기 싫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밭일하러 나가실 때를 노리면 되는거였다. 시아버지의 경운기 소리가 멀어져가는걸 듣고나서도 약간을 더 기다리다 잽싸게 신혼방으로 달려들어갔다. 신속이 생명이다. 빨리 끝내고 안 왔던 것처럼 빠져나가자.


 다락이며 창고방, 베란다를 살펴 잊은것이 없도록 챙겼다. 버리게 되더라도 일단은 챙긴다. 쓸거냐말거냐를 재고 따질 틈이 없다. 빨리, 빨리.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내것 내가 챙겨가는 건데 왜그렇게 쫄아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마도 명백히 내 거라서 손을 댔는데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니가 달려와 "아니, 그걸 왜 가져가니? 그건 아니지." 하면서 제재를 하고, 그것으로 또 푸닥거리 하게 될까봐 겁이났던 것 같다. (이와중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 상상하며 겁먹는 깨알같은 6번 인증..)


 후다닥 챙기고 난 후 마지막 코스는 대망의 신혼방-이었던곳-이었다. 손수 페인트칠을 하고 문고리까지 바꿔달았던 그 추억의 방을 연 순간, 나는 약간 벙찌고 말았다. 이미 싹 비어 있다. 뭐지 이게? 황망해하고 있던 그때, 타이밍좋게 현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그분이 온 거다.


 시어머니는 내가 혼자 고생하는게 마음이 짠해 엄마가 좀 했다면서 대부분의 물건들이 다 치워진 방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말을 늘어놓으셨다. 하나도 귀에 안들어왔다. 부부방이라 해도 별도의 작업실을 가진 X에 비해, 내 물건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곳이다. 내껀지 X껀지 어떻게 구분하시고? 아니 애초에 부부방에 맘대로 들어와서 다 열어봤다고?


 든거라곤 머리카락  올이 전부인 서랍을 보니 입맛이 쓰다. 이미 못볼    마당에, 백번 양보해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신게 맞다 하더라도 실상은 그냥 내가 뭔가 훔쳐가지 못하도록  치워버린 것만 같았다


 편방향의 일방적인 대화는 나의 묵언수행으로 인해 쉽게 끝이 났지만, 시어머니는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내가 '할말 다 했으면 그만 가지?' 하는 메시지를 담아 과장된 몸놀림으로 옷들을 꺼내 정리하는동안 그 모든 과정을 꼼짝 않고 서서 지켜보았다. 그건 진짜 인내심을 극한으로 시험하는 일이어서, 박스를 테이프로 봉할때쯤엔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벚꽃이 한창입니다. 마음 둥둥 뜨는 봄날, 제 글에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킷은 두배로 감사하고요! :)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번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