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라면 한 번쯤 고민해 봤을 곳, 초품아는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의미한다. 보통은 대단지 아파트이거나 통학이 안전해서 집값도 비싸다. 그런데 세품아는 뭘까?
'세상을 품은 아이들'이라는 뜻을 가진 사단법인 세품아는, 소년재판을 받은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소년보호시설이다. 참고로 소년재판에서 10호 처분을 받으면 소년원으로 송치된다. 세품아는 6호 처분을 받았으나 부모의 부재, 방치 혹은 학대로 인해 가정에서 보호가 불가한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최소 6개월 간 외부와 단절된 채 생활하며 재사회화 교육을 받는다. 명성진 목사님을 비롯한 14명의 선생님들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젊음은 없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세품아에서 세컨드 찬스 메이커(Second Chance Maker)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넘어진 다음 세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Second Chance for the Youth)
소위 말하는 '비행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명성진 목사님은 '똥 밟아서'라고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이 아주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럴듯한 사역을 하거나,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대접받고 존경받으며 살 수 있는 교회생활을 벗어난 특수사역이기 때문이다. 재정적인 부분에서도 출석하는 성도들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교회의 특수성을 벗어난, 그야말로 돈 안 되는 특수사역.
게다가 사회의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후원조차도 쉽지 않은 소년범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니 말 다 했다. 그런 인간쓰레기들을 뭐 하러 도와주냐는 댓글들도 있었다. 재사회화 비용도 아깝다는 말이다. 실제로 목사님이 사역 초창기에 만난 한 아이의 전도(?)로 인해 교회에 출석하는 비행청소년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기존에 다니고 있던 일반 교인들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교회로 옮겨갔다고 한다.
이후에 헌금할 능력이 없는 그 많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며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었을지, 자세히 듣지 않아도 그 어려움이 짐작된다. 설상가상으로 건강하던 사모님께서 암에 걸리시며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그 와중에 세품아가 탄생하고 아름답게 지속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이 하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내가 소년원에 출입할 당시, 같은 교회에 다니던 집사님께서 내게 '그런 곳에 다니지 말라'며 진지하게 권한 적이 있다. 내가 미쳤다고 그곳에 놀러 가는 게 아닌데, 오래된 앰프와 마이크, 전자 피아노와 노트북과 빔프로젝트를 들고 나르며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곳에서 예배하러' 가는 것을 알고 계신 분이었다. 그곳에 갇혀 있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퍼다 나르는 행위라는 것을 그분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더러운 영이 역사하는 곳이니 내가 안 좋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안 좋은 영향이라니. 뭐가 옮는다는 뜻인가. 귀신이 씐다는 말인가. 영적인 싸움은 분명 있었다. 나는 매번 아이들에게 탈탈 털리고 왔으나, 그래도 바닥에 있는 나의 진심까지 털렸으니 다행이었다. 나는 당연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부유하는 먼지 속에 사랑 한 톨 섞여 보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목마른 아이들에겐 물도 필요했지만 물 긷는 사람의 모습도 필요했다. 깨진 장독대에 물 붓는 격이라며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자신들의 인생에, 계속해서 물을 길어다 주는 그 미련한 사랑의 행위가 필요했다.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닌, 변화를 담보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어떤 존재의 몸짓이.
내가 스무 살 때 처음 출입했던 소년원, 그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던L목사님도 똥 밟은 셈이다. L목사님도 쉼터를 운영하시며 보호처분을 받은 아이들과 함께 사셨다. 물론 세 명의 자녀들도 함께. 봉사자의 신분으로 함께 했던 칠 년이라는 시간 동안,L목사님께서 어렵게 사역을 이어가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똥 밟았다'는 표현이 아이들에게 미안하면서도 너무나 와닿는 것은, 방황하는 아이들을 통해 보고 듣게 되는 깨진 가정의 모습과 세상의 사각지대가 그만큼 지독하기 때문이다. 나의 성을 구축하는 동안 외면하고 산다면 얼마든지 외면할 수도 있는, 적나라한 삶의 이면을 '똥을 밟음으로써'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감사한 것은, 똥 밟은 신을 버려두고 새 신을 신고 도망갈 수도 있는 삶의 진창에서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랑은 결코 원대한 포부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그럴듯한 모양새가 다 망가진 상태, 삶의 균열로부터 경험하는 알 수 없는 재생이며, 어둠 속에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사랑이다. 황무지에 피는 한 떨기 꽃에 대한 희망이다.
나는 그런 일그러진 모양의 사랑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그럴싸하지 않았고 깨끗하지도 않았지만 아름다웠다.나는 비록 똥 밟은 신을 버려둔 채 맨발로 달아났지만 여전히 그 냄새를 알고 있다. 우연히 세품아에 대한 명성진 목사님의 인터뷰와 영상을 보고 가슴 깊은 곳에서 목울대까지뜨거운 무엇이 올라왔다. 후원이라도 해야 할까,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이런 곳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는 것. 세상에 이런 냄새나는 곳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후서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