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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13. 2024

나의 때는 언제인가

Already, Not Yet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때는 언제일까? 전성기라고 하는 시기가 과연 내 인생에 있을까? 꿈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꿈을 이루고 싶을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쓰는 삶을 꿈꾼다. '작가가 되는 것'은 궁극적인 꿈이 아니다. 작가가 되면 내 책은 인증 표식이 되는 걸까. 그것으로 나는 작가라는 자격을 부여받는 것일까. 책을 출간하는 것은 내 꿈을 이루는 과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정식으로 판을 깔고 쓸 기회가 많아질 것이므로. 아닐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발적 행위를 넘어 출판사의 선택을 받아 책을 써낸 '글쓴이'로서,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쓰는 삶은 꽤 근사해 보인다.


어쨌거나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닌 그저 쓰는 삶을 꿈꾼다면 나는 이미 꿈을 이룬 것 아닌가? 지금도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내가 꿈꾸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장면 속에 내가 들어가 있을 때, 그 장면을 목도할 때 나는 꿈을 이루었다고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려본다. 그 장면에 내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커져야 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담는 마음의 그릇이 커져야 하고, 말을 고 말을 꺼내언어의 그릇이 커져야 한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글이며, 글에 담고 싶은 것은 결국 사람이다. 문자가 아니라 문장이며, 문장 속에 담고 싶은 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그들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는 비단 경험만을 중요하다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상황에 처해있을 땐  상황을 감당하느라 나의 에너지가 전부 소진 수 있다. 그러느라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내가 속한 부분에 매몰되어 그 너머를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보고, 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쓰는 것이다.


창공 위로 날아오를 때는 목적지를 향해 날갯짓을 하는 데 힘쓴다. 목적지가 없거나 목표물이 보이지 않아도, 내 몸 하나 공중을 가르고 달아놓기 위해선 날갯짓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작은 새일수록 더욱 그렇다. 나는 참새 수준밖에 되지 않아서, 겨우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동안 날갯짓을 쉴 수가 없다. 날개를 펼친 채 여유 있게 관망하는 능력이란 아직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몸뚱이를 움직여서 내 몫을 살아내는 것도 아직 버겁단 얘기다.


그러나 진심을 다하는 것이 생겼을 때, 이것이 나의 일상까지도 뒤흔들 때, 이것으로 '나의 때'를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나의 때는 언제를 의미하는가? 내가 높은 곳에 올라설 때인가? 그렇다면 내가 높은 곳에 올라서 주목받을 때, 나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나는 과연 그곳에서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곳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일까 나일까? 무엇일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베드로전서 5:6)


우리 집 저녁 루틴에 따라 지난밤 딸이 암송한 성경구절이다. 유난히 마음에 와닿아서 나도 계속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후반부 말씀에 마음이 갔다. 때가 되면 높이시리라. 나를 높여주시는 때가 언제일까? 나의 때는 언제일까? 그런데 높여주시는 주체를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겸손함과 높여주시겠다 하신 약속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고(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예수님 앞에서 누가 크냐 논쟁하는 제자들에게는 사람의 끝이 되고 사람을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기 이름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 하나를 맞이하는 것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큰 일이라 말씀하셨다. 결국 나의 때는 내가 높아지는 때가 아니라 낮아지는 때인 것이다. 사람들 앞에 높아지기 위해 겸손해진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때는 둑이 무너지는 때이다. 둑이 무너지면 내 주변의 물은 내게로 한꺼번에 흘러들어올 것이다. 그때 나의 수면이 높아질 것이다. 높아진 수면 위에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볼 것이다. 수평선 너머의 풍경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둑으로 둘러싸여 있던 나의 좁은 세계가 무너지고, 더 넓은 사방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나는 그 세계를 보고, 생각하고, 쓰는 삶을 꿈꾼다. 그때를 위해 나는 배를 만든다. 둑이 무너지는 때,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중심을 세운다. 침몰되지 않기 위해 점검하고 보수한다.


나는 내 안에 고여있던 것이 찰방찰방 넘칠 때 글을 쓴다. 언젠가 나의 때에, 둑이 무너짐으로 내 자리에 넘쳐난 것을 또한 글로 쓸 것이다. 우리는 넘친 것만 글로 쓸 수 있으며 그런 글만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나는 결국, 내가 바라는 것은 결국 계속 쓰는 인생이다. 쓸 것이 많은 인생이 되고 싶은 것이다. 범람하고 범람하여 결국 누군가에게 닿고 싶은 것이다. 올라서는 인생이 아니라 무너지는 인생이다. 견고하게 세워둔 나의 둑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나의 때가 오고 있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 파란색으로 표기한 부분은 김종원 작가의 문장을 인용하였습니다.


* 사진 출처: Pixabay, Nanne Tigge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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