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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29. 2024

나의 인형은 어디로 갔을까

욕구를 빼앗고 절망을 채우기보다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잘 사주지 않는 편이다. 공식적으로 장난감을 사주는 날은 일 년에 딱 세 번뿐이다. 어린이날, 생일, 크리스마스. 그 외에는 특별히 기념할만한 일이 있거나 '칭찬스티커'를 다 모았을 때 정도이다. 꽤 오래 걸려서 백 개를 모은 딸이 요구한 선물은 고작 타투 스티커였다. 흔쾌히 5종 짜리로 주문해 주었다.


감사하게도 웬만한 책과 장난감은 시조카들을 통해 때마다 공급받는 편이다. 이제는 책만 해도 둘 곳이 마땅치 않을 정도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도 유행이 있는 법. 애석하게도 나는 아이들의 유행에 맞춰 줄 만큼 신상 엄마가 아니다. 특히나 아들에겐 맥포머스, 헬로카봇 같은 건 절대 사주지 않았다. 줄줄이 사탕 격인 시리즈물은 애초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대신 해당 캐릭터가 그려진 물통이나 숟가락, 티셔츠, 양말 따위의 실용품으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색종이는 반짝이 색종이까지 기꺼이 주문해 준다. 페이퍼 블레이드, 윙즈, 로봇, 공룡까지 섭렵하더니 거의 다 접을 수 있게 되자 조금 시들해지는 것 같다. 내친김에 가끔 보여주는 유튜버 종이선생님이나 네모아저씨처럼 다른 사람을 가르쳐보자고 했다. 공기계를 대충 의자에 올려두고 밑에서 접게 했더니 30분 동안 꽤 진지하게 쫑알거린다. 귀엽고 흐뭇하다.




소유할 수 있는 장난감이 없던 시절, 나도 종이로 무언가를 만들며 놀았다. 엄마는 폐지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고 그중 깨끗한 것으로 나는 무엇을 공작하길 좋아했다. 엄마는 폐품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나를 기특해했고, 돈 안 드는 놀잇감이니 더욱 장려해 주었다. 운 좋은 날은 색지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색지가 너무도 소중하여, 자투리까지 모아놓고 귀퉁이까지 오려 썼던 기억이 난다. 작품(?)을 창조하다 보면 아주 작은 부분에도 꼭 그 색깔이 필요한 때가 있었으니.


그러나 아무리 종이로 무엇을 훌륭하게 만들었다 한들, 튼튼하고 깔끔하고 곡선을 이루는 완벽한 입체감을 가진 플라스틱 놀잇감보다 아름다울 순 없었다. 어릴 적 친척어른의 선물로 내 품에 잠시 들어왔던 사람모양 인형이 그러했다. 실제 아기만큼이나 꽤 컸던 그 인형은 포장 상자 속에서 눈꺼풀도 떴다 감았다 했다.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그 인형은 만지면 머리칼의 색깔이 분홍색으로 변한다고 쓰여있었다. 나는 당장 그 인형을 품에 안고 싶었다. 어서 만져보고 쓰다듬어서 웨딩피치 같은 분홍색 머리칼을 보고 싶었단 말이다!


그런데 엄마는 그 인형을 풀어보지도 못하게 하며 내 품에서 상자째로 빼앗았다. 그러고선 만지지도 못하게 장롱 위에 올려두었다. 우리 집은 입식문화가 아니었기에 발 디딜 의자를 구할 수도 없었다. 어린아이에겐 천장과 맞닿은 장롱 위 공간은 손이 닿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다. 보이지나 않으면 모를까. 그곳에서 며칠간 나를 내려다보던, 연두색 머리칼의 그 인형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엄마는 그때 일을 기억도 못하신다. 그래서 그 인형이 누구에게 갔는지도 모른다. 그저 가난했던 엄마가 그 시절 이런저런 모양으로 도움을 받았던 누군가에게 '빚진 마음으로' 건넸을 것이다. 그 집에는 아마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었을 것이고. 엄마는 자기 돈 들여 사줄 형편은 아니지만 새 물건이 들어왔으니 뜯지도 않고 선물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자신의 체면과 받는 사람을 생각해서.


그 과정에서 내가 완벽히 생략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러웠다. '나의' 선물로 들어온 것인데 '나의' 욕구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사실이. 철없던 어린아이 시절의 기억이지만 그때의 박탈감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사실 지금도 남아있는 것 같다. 이렇게 글로 장황하게 써 내려가는 것을 보면. 그래서인지 나는 아이들 선물로 들어온 것이 있으면 '누가' 준 것인지 꼭 출처를 밝히고 아이들에게 전달한다. 다른 사람을 준다고 해도 아이의 동의를 받는다. 애초에 내가 아이들 소유라 할 만한 것을 많이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빚을 아이의 것으로 갚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의 시대엔 빚을 갚기보다는 비우기 위해 설득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하다.




조금만 크면 시시해질 것, 몇 번 갖고 놀지도 않고 버려질 것, 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일로 여겨버리는 마음이 어른에게는 있다. 어른은 실리와 효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리와 효율이 매번 아이의 욕구를 굴복시키기만 해서는 안된다. 닳고 닳아 버려진 어른들의 욕구 앞에서 아직 닳지 않은 아이의 세계는 지켜져야 한다.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세계이기에 어쩌면 더더욱.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매번 사주거나 욕구를 완전히 채워줄 수는 없겠지만, 원하는 그것을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라절망이 자리 잡게 해서도 안 된다. 아이가 스스로의 욕구를 살피고,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지 돕는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이제는 스티커 대신 돈을 모으고 있다. 백 원 단위로 모으고는 있지만, 글밥이 꽤 많은 책을 하루에 세 권씩, 열흘에 걸쳐 삼십 권을 읽으면 천 원이 생기는 셈이다. 일주일 단위로 정산해서 받은 돈을 각자 저축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떠올린다. 그것의 가격을 알아본다. 그것을 얻으려면 얼마를 더 모아야 하는지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경제교육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렇게 나는 아이들이 배우고 성장하길 원한다. 원하는 것을 빼앗기고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아이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나는 이런 것을 배운 적이 없지만 나의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서 배운다. 눈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며 나의 피곤한 눈도 번쩍 뜨인다.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돈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귀엽고 흐뭇하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원래부터 너의 것은 없어. 너의 팔, 다리, 신체도 네가 잠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일 뿐이야. 함부로 쓰거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고장 나고 말 거야. 너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네 안에 있지만, 그것을 꺼내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엄마아빠가 제공해 줄게. 다만 이 외에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봐. 누군가 네게 주기만을 바라기보단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 말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바꿔볼 수도 있겠지. 그것을 '교환'이라고 한단다.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면, 돈을 모아서 직접 살 수도 있어. 그런데 아직 너는 사회에서 돈을 벌 수 없으니, 엄마가 너의 노력을 돈으로 '교환'해줄게. 어떤 노력이 돈으로 교환해 줄 만한 가치가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



* 사진 출처: 쿠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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