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눈부셔!"
자기 엄마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재간둥이를 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는 의미다. 그 넉살에 기분 좋게 감탄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나의 딸은 내게 사랑 표현을 많이 해 준다. 말보다는 냅다 몸으로 표현하는 남편과는 달리, 예쁜 말로 표현해 주는 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긴 머리에 원피스를 입은 친구 엄마를 보고 예쁘다고 했던 딸의 말을 기억한다. 관리 차원에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를까 고민했지만 당분간 유지하기로 했다. 푸석함이 더해지면 자연스레 짧은 머리를 고수하게 될 것도 같아서. 바지를 즐겨 입는 편이지만 치마도 종종 입어준다. 아이 학교의 행사 때는 운동회를 제외하곤 늘 치마를 입고 갔다.
아이가 생각하는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엄마가 몇이나 될까? 아이들마다 미의 기준이 정립되는 시기는 다르겠지만 백이면 백, 세상에서 나의 엄마가 제일 예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나의 엄마라서, 엄마가 엄마로서 충분했던 순간. 나는 이 시기를 충분히 누리려 한다. 이 조그만 아이 속에 충만한 사랑을. 나를 향한 백 퍼센트의 순정을.
아이는 곧 있으면 제법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남들과 비교도 해가며 자기만의 기준을 정립해갈 것이다. 제 부모에 대한 평가도 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겠지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철이 들 때쯤엔 사랑이 이해라는 형태로 바뀌어갈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엄마를 정의할 것이다. 나의 엄마는 이런 사람이니까, 하는 정의가 없이는 이해를 보탤 수가 없을 테니까. 그 기준에서 나는 아이에게 어떤 엄마로 정의될까.
미의 기준은 제각각이다. 제각각이어야만 한다. 한 세대를 두고 있는 나와 딸의 기준도 다를 것이다. 지금은 기껏해야 아이의 이상향에 맞춘 긴 머리칼과 치마 정도로 예쁜 엄마 행세를 하지만, 외면의 아름다움은 세월 앞에서 무색해질 뿐이다. 엄마만을 바라보던 아이는 이제 그 너머의 세상을 향해 시선을 던진다. 요람이 되어주던 엄마는 배경이 된다. 세상 속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던 아이는 보이지 않는 탯줄을 따라 다시 엄마 앞에 설 것이다. 아이는 엄마를 바라보다가, 엄마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훌쩍 커버린 아이의 눈에 늙어버린 엄마는 더 이상 아름답진 않겠지만, 엄마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현실적인 측면에서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다만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엄마가 보는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운 것에는 감탄이 따른다. 무엇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것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감탄을 잘한다. 속성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상실한 능력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하나둘씩 알려주며 회복한 감각이기도 하다.
"우와! 이게 뭘까~?"
"우와! 이것 좀 봐!"
아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가짜 감탄으로 시작했다가, 아이가 흥미를 가질만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을 다시 배운다. 아이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놀이동산에 갔다가 나를 만났다. 엄마 아빠 손잡고 오고 싶었던 그곳에 어린 나를 데려간 기분이었다. 두 배로 즐겁게 놀았다. 아이들 덕분에 어릴 때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다녔다. 다 커서 가도 재미있었고, 맛있는 것을 자유롭게 사 먹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아이가 감탄하며 바라보는 세상은 과연 아름다웠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는 모든 것을 신기해하며 감탄했다. 감탄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배워갔다. 그러나 아이가 어른이 되고 감탄의 감각이 시들해질 때쯤, 나는 엄마로서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것을 보고 감탄할 수 있을까. 아이는 곧 이 세상이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감탄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이번엔 진짜 감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가짜 감탄으로 시선을 끌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중년 엄마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죄다 꽃 사진이라는 말에 공감하며 웃은 적이 있다. 물론 우리 엄마는 카카오톡 계정도 없지만, 내 핸드폰에 저장된 그 나잇대 중년 여성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을 것이다. 자연의 빛깔과 생명력에 감탄한 것이다. 이런 감탄의 능력이 삶의 곳곳에 피어나야 한다. 감탄함으로써 그 가치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감탄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마음밭을 기경해야 한다. 아이 키우며 살기 팍팍한 세상이라 해도, 이 팍팍한 세상에서 기어코 자라난 아이를 위해서라도 부모는 꽃을 피워야 한다. 감탄하는 어린아이로 인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면, 감탄하는 어른으로 자라 다시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어느새 감탄의 감각을 상실하고 세상이 시시해진, 어른이 된 아이에게. 적어도 아이가 커서 늙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죽음을 먼저 떠올리지는 않길 바랄 뿐이다. 쇠하여 죽어가는 육체를 입은 엄마를 통해서도 생명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비록 감탄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없더라도, 감사하고 감탄하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저 너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길. 부디 아름다운 세계에서 살아가길.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너의 존재로 인해 엄마는 매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단다. 심장소리를 듣고, 손과 발이 생겨나고, 눈코입을 모두 갖춘 작은 생명체가 뱃속에서 태어나다니. 어쩜 그럴 수가 있는지. 너로 인해 말할 수 없는 해산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아름다웠고, 그가 지으신 우리의 존재도 아름다웠다는 걸 너를 통해 알게 되었지. 이제는 아름답지 않은 것들 속에 섞여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가 지으신 것들에는 그분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단다. 엄마는 그것을 발견하고 있어. 하나님께 감사할 때 눈을 열어 보여주신단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거지. 감탄의 능력은 감사의 능력과도 같아. 네가 어린아이였을 때, 엄마 눈엔 별것 아닌 것들에도 우와! 하며 감탄하는 네가 어찌나 예쁘던지. 자꾸만 너에게 새로운 것을 쥐어주고 싶더라니까. 가끔 세상이 시시해 보이고 사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작은 것에도 감탄했던 시절처럼 작은 것에도 감사해 보렴.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 거야."
*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