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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20. 2024

쓰기의 감각

잊고 있다가 되살아난 감각


휴직기간 중 도서관에 출입하며 내 안에 되살아난 감각이 있었다. 바로 쓰기의 감각이다. 앞서 쓰기의 욕구가 먼저 일었겠지만, 번뜩이는 감각이 날을 세우듯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쓰기의 감각을 알고 있었다.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그 시절을 건너뛰어 다시 깨운 이 감각은, <쓰기의 감각>이라는 책을 읽으며 확신과 용기를 얻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은 작가가, 구구절절 내 마음에 합한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 라모트의 글은 재치가 넘쳤다. 예컨대 이런 문장에서 나는 피식 웃었다.


최악의 경우, 그들은 당신에게서 눈에 띄는 재능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으니 다시는 어떤 글을 쓰려는 수고도 하지 말고, 심지어 당신의 이름조차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242p


이름조차 쓰지 말아야 다니, 어처구니없는 비판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참으로 기막히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책을 덮고 내 가슴을 쓰다듬게 만들었다. 이토록 생각이 합치될 수가 있다니. 이것은 단순히 어떤 공감을 이끌어내는 표현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다. 글을 쓰는 이유, 즉 가치관이 일치하는 것에서 오는 영혼의 울림이었다.


작가가 되는 일은 늘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당신이 깨어 있고, 통찰과 단순성과 진실에 대한 진정한 배려를 갖추고 글을 쓸 때, 당신은 독자의 인생을 밝혀 줄 빛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독자는 당신이 말하는 것과 당신이 그려 낸 그림에서 자신의 인생과 진실을 알아볼 것이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 많이 느끼고 있는 끔찍한 고독을 감소시킨다. 335p


내가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진정성과 통찰력이다. 쓰기의 감각을 지금보다도 더 어렴풋이 알았던 때에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통찰로 글을 전개하거나 급히 내린 정의로 마무리하곤 했었다. 경험도 그만큼 적었던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순성은 진정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내면에서 꺼낸 것들이 진실하지 않거나 글이 오히려 그것을 포장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면, 글은 그만큼 모호해지거나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십오 년 전의 나는 어렸고 자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글이 모호하고 복잡했다. 태도는 진지했으나 진실하지는 못했다.


당신 내면의 어떤 것이 진짜라면, 우리는 아마도 그것에서 재미를 발견할 것이고, 그것은 마침내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다. 그러려면 당신의 작품 속에 진정한 감정을 담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감정의 핵심으로 들어갈 수 있게 직설적으로 써라. 상처받기 쉬운 취약성에 대해 써라. 감성적으로 보일까 봐 걱정하지 마라. 오로지 무용한 것이 되지 않을지만 걱정하라. 336p


진실하지 못했던 까닭은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열 개의 감정이 있다면 내가 인정하는 감정은 그중 한 두 개 정도에 불과했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어딘가 고장 나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심지어 가깝게 지내던 사람으로부터 편집증세를 의심받기도 했다. 다행히도 당시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던 사람들로부터 자주 피드백을 받았다. 어떤 때는 위험할 정도로 나에 대한 판단을 타인에게 맡겨버리기도 했고, 종이장처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흔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제법 나를 있는 그대로 세워두고 바라볼 줄 안다. 내가 추구하던 나의 모습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자의 얼굴, 토끼의 귀, 용의 뿔, 말의 몸처럼 온갖 좋은 것들을 떼어 갖다 붙여놓은 존재는 괴물같이 흉측하기만 했다. 나는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과 감정까지 통제하려 했다. 본캐가 있어야 부캐가 있는 법인데, 그럴듯한 부캐만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필요로 한다. 왜곡 없이 자신들을 비춰 주고 서로를 비춰주기 위해. 348p


왜곡된 자아를 벗고, 나의 내면에서 진실된 감정과 생각들을 꺼내놓는다. 글쓰기는 포장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벗겨내기 위한 작업이다. 홍보를 위한 글쓰기에서조차도 그 상품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벗겨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물며 심연처럼 깊은 내면을 표현하는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덧입혀진, 혹은 묻어둔 감정을 벗겨내고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오직 진실된 감정들만이 수면 위로 떠올라 뜰채 안에 걸러질 수 있을 뿐이다. 무엇을 더하면 더할수록 깊이깊이 가라앉기만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럭저럭 써나가다가도 무엇을 어떻게 쓸지 모르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이것은 더 좋은 전개나 표현을 두고 고민하는 것과는 다르다. 글을 쓸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왜곡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내가 솔직한 글쓰기를 지향하는 이유다.


그들이 어떻게 혹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까지 당신이 알려 줄 필요는 없지만, 당신이 이해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전하고, 당신이 찾아낼 수 있는 최대한 명확하고 진실한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그것은 종이 위에서 자기만의 임무에 충실한 작은 등대처럼 반짝일 것이다. 등대는 곤경에 처한 배를 찾기 위해 섬 전체를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한자리에서 서서 여러 방향으로 보낼 뿐이다. 349p


종이 위의 등대.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내가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최대한 진실하게 표현하는 일. 그저 나의 자리에서 나의 언어로 쓰는 글은 누군가의 마음에 빛을 보낼 수 있다. 그것이 아주 잠시 잠깐의 순간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반짝 빛낼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종이 위의 등대 같은 삶이 되는 것이다.


직접적이고 감정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하라. 너무 미묘하거나 애매모호하게 쓰지 말고, 당신이 쓰려는 소재나 당신의 과거에 대해 너무 두려움을 갖지 마라. 당신의 글을 완성하지 못하는 일만 두려워하라. 336p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삶. 받아들이고 글로 쓰는, 받아쓰기의 삶을 지향한다. 그러기 위해선 직접적이고 감정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러한 방식이 너무나 적나라하고, 불편하고, 민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드러내야 할 일인가, 굳이 이 부분까지 들춰내 써야만 하는 걸까 싶다가도, 하나 둘 외면하기 시작하면 다시 눈을 감게 된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시켜 본다.


종이 위의 등대 같은 삶을 꿈꾸지만 나 역시도 망망대해 속 등대를 찾아 헤매는 삶일 뿐이다. 잠시 잠깐 내 안에 무엇이 반짝였던 순간, 또 다른 등대가 나를 비추었던 그 순간에 나는 용기 내어 외치기로 한다. 메이데이(m'aider), 저 여기 있어요. 그리고 그곳으로 천천히 나아간다. 잘 지어진 배 위에서 우아하게 서 있는 모습이 아니라, 난파된 배에 매달린 채 처절한 모습으로 헤엄쳐가는 볼품없는 모습이다. 나의 외침으로 인해 누군가의 시선을 끌고 이 모습을 들켜버린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외치고 나아가는 삶을 선택했다. 살아있는 한 나는 쓸 것이다. 나를 일으켜 세운 쓰기의 감각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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