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편집증이 아니야
조각난 삶을 편집하지 않아도 괜찮다
문득 이십 대 초반 시절 가까운 지인에게 조심스레 진단(?) 받았던 경험이 생각났다. 너는 편집증세가 있는 것 같다고. 그땐 편집증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가 어떤 점에서 내게 그렇게 말했는지 정도는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어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야 편집증의 뜻을 찾아보니 강한 자기중심적 성향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편집성 성격장애, 망상증 정도로 정리가 된다.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 혹은 전체적인 관점이 아닌, 자기 안에 부분적으로 형성된 잘못된 믿음이나 생각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정신적 장애인 것이다. 어느 백과사전에서는 타인에 대한 편견을 고집하는 정신질환이라고도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지인은 오해를 단단히 하는 나를 두고 그렇게 진단했을 것이다. 오해를 상당히 체계적으로 한 데다, 혼자서 생각하다 보니 오해의 골은 끝 간 데 없이 깊어졌던 탓이다. 나는 그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을 딱 한 명 만나보았는데, 오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나는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지 조심스레 살펴본다. 여전히 내가 보는 나와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나 사이에 격차는 존재한다. 하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이전과 같지 않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반쯤 눈을 감고 바라보고 싶던 세상이었다. 그것은 내가 속하고 싶은 세상과 결코 같지 않았다. 이 세계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위험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도, 현실을 직시하고 현재를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그 세계에 살고 있는 나를 내보이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악순환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의 경우 단순하게는 다모임이나 싸이월드에 올리는 사진에서부터 그러했다. 당연히 공개적으로는 부분적인 요소만을 게시할 수밖에 없겠으나, 그 부분으로 의도한 방향이 달랐다. 이것은 삶의 다른 면을 보이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내가 편집한 부분을 접한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조망해 주길 바라는 전체적인 그림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무슨 작품에서 여운을 남기며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는 열린 결말도 아닌 것을, 나는 그렇게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내보였다.
이제 나는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를 천천히 조망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있던 나라는 연약한 존재를 바라본다. 종국에는 그와 손잡고 지금 나의 세계를 바라보기로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그리고 우리가 꾸는 꿈은 맞잡은 두 손 안에서 부풀어 오른다. 우리 사이를 가득 채운다. 우리는 더 이상 애처로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조각난 삶과 표정을 편집하지 않아도 된다. 여전히 그는 마음에, 나는 현재에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 있지만 우리 사이엔 충분히 부풀어 오를 꿈이 있다. 마침내 우리는 그것에 포근히 각자의 얼굴을 묻고 둥실, 떠오른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된다.
* 사진 출처: Pixabay, Frauke Rie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