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땐 너를 지켜
너무나도 낮은 나의 한계선에서
보통의 남자들이 그렇듯, 남편은 내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 해결책을 제시하는 편이다. 공감을 바탕으로 마음을 만져주는 위로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나 종종 본질을 언급할 때가 있고, 그것이 내게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아이가 다니는 기관의 행사 날 학부모들이 모였다. 나는 그나마 기존에 말을 여러 번 섞어본 엄마들에게만 옅은 미소를 담은 목례를 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아이에게만 시선을 고정하다 돌아왔다. 참관수업 특성상 아이를 보는 게 당연하지만 중간중간 아이 친구 엄마에게 다정한 말을 건넬 수도 있었으리라. 맞벌이 엄마로서 얼굴 비칠 일이 별로 없기도 했고 말을 섞을 기회는 더더욱 없었으니 이번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가 평소 제일 친하게 지낸다는 친구의 엄마에게도 말을 붙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 누구 엄마예요. 평소에 저희 아이가 OO를 많이 좋아하더라고요."
라며 살갑게 인사 정도는 건넬 수 있었다. 아이가 그 친구를 종종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그 친구의 엄마의 연락처를 몰라서 부를 수 없노라>고 줄곧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마치 그 핑곗거리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나는 그 엄마에게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않았다. 친구집에 초대받은 누나를 대신해 정 짝수를 맞춰야 할 때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oo 엄마에게 연락하는 편이다. 이거면 됐지, 하며 나는 관계망을 더 이상 넓히지 않았다.
나의 이런 태도가, 아이의 친구관계는 고사하고 나라는 인간 자체로서 추구하는 가치에 합당한 태도였는가 문득 반성이 되었다. 글을 쓸 때는 겸손하게 낮아지기로 해놓고선, 당장의 현실에서 옆 사람에게 눈길 한번 안주는 태도는 교만의 극치가 아니었는지 자괴감이 밀려왔다. 마침 나의 곁을 어슬렁거리는 남편을 옆에 앉혀놓고 이런 마음을 털어놓았다.
"네가 요새 힘들어서 그러네. 힘들 땐 너를 지켜. 잘했어. 뭐 굳이 그럴 필요 있나."
크게 고민도 안 하고 던진 듯한 남편의 대답에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유난히 체력이 달린 탓에 복직 이후 생활이 힘들긴 하다. 그렇다고 휴직 기간에 하원 후 기관 앞마당에 오래 머문 적도 없다. 원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의 기질을 역행하는 행위다. 그런 내가 나를 둘러싼 관계도 아닌, 아이 친구 엄마들에게 뭘 얼마나 신경 쓸 수 있었을까.
물론 눈인사 정도는 살갑게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눈 마주치는 것조차 피곤해하는 인간이라니. 내가 겨우 이 정도도 노력해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약간 괴롭긴 하다. 결국 남의 시선을 의식한 채 나의 됨됨이에 실망했다는 것이 이 고민의 주된 이유다. 여전히 나는 고민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고 있다. 아주 가끔 몇몇 특정인들에게서만 따뜻함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을 뿐, 무심함이 고정값인 내게 새삼 실망할 것도 없었는데. 글을 쓰며 주로 사랑을 말하다 보니 사랑은커녕 냉정한 태도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잠시 놀란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이, 누군가의 글을 읽고 그 마음을 살피고 마음을 다해 댓글을 달고 다니는 행위를 뭐라 해야 할까. 사랑을 말하는 나의 글은 종이 위에서만, 아니 화면 위에서만 춤을 출 수 있는 걸까. 책을 덮듯 마음을 덮으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는 걸까. 나는 글이 삶이 되길 바라고 삶을 글로 쓰고 싶은데.
다소 모순되기는 해도 거짓이 아님은 확실하다. 종이 위에, 아니 핸드폰 위에 입력하는 나의 글에 담는 마음은 분명 실재한다. 그렇다면 실체는 어디에 있나. 나누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내보이긴 싫은 걸까. 미소로 한두 마디 말로도 가볍게 내보일 수는 없는 걸까. 서로가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는지 모르는 채로 마주치는 얼굴들은 무의미한 걸까 아니면 다행인 걸까. 어떻든 당장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관계라고 정의해 두는 편이 적당하겠다.
마지막에 남편이 덧붙인 말이 있었다.
"남편한테나 잘해. 으이그."
나를 직시하지 못하고 던진 우문에 현답을 연달아 들었다. 그래, 현실에서 내가 마음 써야 하는 관계들이 이렇게 내 곁에 집을 짓고 있구나. 어쩌면 나는 마음을 지키고 있는 걸까. 얼마 되지도 않는 적은 돈으로 사야 할 것이 많아서 고민하는 아낙네처럼, 나의 작은 마음을 써서 사랑으로 돌봐야 할 존재들을 생각한다. 어쩌다 어른이 되고 어쩌다 아내가 되고 어쩌다 엄마가 되어서.
그래도 나의 한계를 당면하는 일이 슬프지만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한계선에서 내가 바라는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을 쓰기 위해 마음을 구한다. 사랑을 쓰기 위해 사랑을 찾는다. 인생이 쓰기에 글을 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쓴다. 내 마음속엔 멋진 그림이 있지만 나는 아직 색채 단계가 아니다. 서걱서걱, 빈 공간에 사물의 형태를 나타내는 밑그림을 그려 넣듯 토독토독, 깜박이는 커서를 밀어내며 밑바닥을 써 내려간다.
* 사진 출처: Pixabay, Thomas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