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 헤르만헤세, <데미안> 중
나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은 나를 자극하지 않는다. 그동안 수없는 무심함으로 세상의 자극을 흘려보냈던 까닭은 내 안에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꿈이든 무엇이든. 그것을 낚아챌 만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볼만한 호기심이나 흥미가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나의 작은 세계를 깨뜨릴만한 의지도 없었다. 내 속에 그를 향한 마음이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그 어떤 것을 끝까지 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자극하다 못해 할퀴고 지나갔던 수많은 가시들 또한 결국 내 안에 있었다. 나는 헤르만헤세처럼 나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탐구하기에는 너무 지쳤다. 나에게 이르기 위해 나를 들여다보는 것은 많은 힘이 소요되는 일이다. 그리고 결국 나 자신에게 이르렀다 한들, 나는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을 견딜 수 있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는데 나는 아직 한없이 연약하기만 하다.
내 안에 끓어오르는 짜증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천진한 얼굴에 쏟아내었다. 잔뜩 힘을 준 눈에 아이의 황망한 눈을 기어이 맞추게 하여 눈빛으로 독침을 쏘아대었다. 독침을 맞고 떼구루루 내려간 눈알을 따라 고였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내 속에서 나온 아이의 눈물 한 방울을 감당치 못해서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먼저 걸어갔다.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 엄마를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길에서 보이지 않는 목줄을 움켜쥐고서. 본인의 감정만을 우선시하는 아이에게 화가 났던 건데, 결국 나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저 짜증을 더 큰 짜증으로 덮은 셈이다.
인간세계는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세계다. 어쨌거나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 살길을 찾아야만 한다. 헤르만헤세처럼 이 세계에 '던져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 본래의 모습과 목적성을 찾고 싶다. 그러려면 나를 만든 창조주께로 가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나왔지만 또 다른 피조물인 나의 아이에게도 그 목적을 다하고 싶다. 내게 맡겨진 존재에 대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그의 감정은 그의 것이며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 함께 그 시간을 견디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겠다.
나에게 이르는 길도, 아이에게 이르는 길도 모르겠다.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시간, 이미 하나님이 보이신 그 길을 자세히 들여다봐야겠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 봐야겠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