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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2. 2024

포장의 기술


엄마는 폐지를 모으러 다니기 전부터도 종이를 아끼셨다. 엄마가 쉽게 버리지 못하는 건 종이만이 아니었지만, 특히 종이는 가벼우면서도 쓰임새가 좋았다. 신문지는 나물을 다듬거나 잡다한 작업을 할 때 펼쳐놓기에 알맞았고, 견고한 포장 박스는 오랫동안 보관함 역할을 했다.


학창 시절 뭔가를 쓰고, 그리고, 오리고, 붙이고, 만드는 일에는 종이가 필요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드는 일에는 이면지부터 색종이, 색지와 도화지, 두꺼운 상자까지 동원되었다. 꾸미기용 색지는 아주 조금의 양이 필요할 뿐이라서, 오려 쓸 여백의 공간이 없을 때까지 두고두고 사용했다.


조선일보 한 면에 실렸던 <광수생각>이라는 만화를 좋아했다. 만화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END로 끝내는 한 줄 생각이 기가 막혔다. 그 한 줄에는 만화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이후로 접했던 그 어떤 캐치프레이즈 문구도, 그 시절 광수생각 한 줄의 여운보다 깊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은 신문을 구독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어디선가 날짜 지난 신문을 주기적으로 모아 오셨다. 나는 <광수생각>이 실린 뒷면을 엄마가 다 읽었는지 확인한 후, 그 부분만 오려내 하드보드지에 덧대어 필통 따위를 만들었다. 완성품은 꽤 그럴듯해서 친구들에게 여럿 선물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종이를 알뜰살뜰 활용하는 게 보기 좋았는지 엄마는 선물포장지도 버리지 않으셨다. 종이의 지저분한 면은 앞뒤로 해서 풀로 붙여버리면 그만이었는데, 포장지는 살짝 난감했다. 그건 영영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물모양에 따라 접은 자국이 남아있는 종이포장지는 재활용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묶어버린 자국이 남아있는 비닐 포장지는 당최 어디다 쓰라는 건지. 용도를 다한 포장지들은 그저 깨끗하다는 이유만으로 버림받지 않았다.


물건이 새것이라도 포장지가 헌 것이라면 포장을 안 하느니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대개 어릴 적 선물이 그렇듯이 비싼 물건이 아니었기에, 가격이 다 보이는 선물을 포장도 없이 내밀기는 어쩐지 쑥스러웠다.


포장지의 전체 면적 중 자국이 선명하지 않은 부분 위주로 오려내었다. 그리고 내가 골랐던 선물을 갖다 대니 얼추 포장이 가능했다. 구질구질한 종이들이었지만 이 정도 면적만 감쌀 수 있다면 충분했다. 포장지에 맞춰서 고른 건 아니지만 크기가 맞아서 다행이야, 마침 골랐던 선물의 크기가 작았던 거겠지. 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내 마음도 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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