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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2. 2024

모른다는 대답


"아, 몰라, 몰라."

"잘 모르겠는데요."


보통 모른다는 말은 생각하기 귀찮거나, 신경 쓰기 싫을 때 받아치는 가장 적당한 대답이다.


대학시절, 나는 어느 선배와 대화 중이었다. 그 선배는 나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질문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선배는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나는 성심껏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적어도 대충 대답하거나 대화 중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그 선배와 친해지고 싶었던지라 대화에 바짝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자꾸 모르겠다는 말만 하네."


그 선배의 피드백은 정확했다. 정말 그랬다. 나의 장황한 대답은 호흡이 길었지만 잘 모르겠다로 시작하거나 잘 모르겠다로 끝났다. 혹 가까스로 그럴듯하게 마무리해도 선배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


답답했다. 내게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주는 선배에게, 내가 평소에 친해지고 싶었던 선배에게 나는 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화가 깊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신나게 비키니 수영복을 차려입고 수영장에 갔는데, 수영장 입구가 어딘지 몰라 바깥에서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부끄러웠다. 얼른 자연스럽게 물속으로 입수하고 싶었으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가득한 습기와 통풍이 되지 않는 수영복 사이로 땀이 비질 흐르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내가 그토록 어려워했던 선배의 질문들은, 전부 나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무엇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등등..


분명 대답할 거리가 있었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마땅하거나 분명하지 않았다. 선배의 날카로운 피드백에 어떤 대답을 해야 좋아 보일까를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막막하고 답답했다. 나는 선배 앞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배야말로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봐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동안 사람들과 나름 술 한잔 기울이지 않고도 깊은 대화를 해왔다고 자부했었는데, 사실 그 대화의 포문은 내가 게 아니었다. 나의 애매한 대답에도 그들은 추가로 의문을 품지 않고 어물쩍 통과시켜 주었던 것이다.


아, 너는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것이 편한가 보구나. 하는 수용의 배려였을 수도 있고, 장황한 말들 속에서 더듬거리는 내 영혼의 손짓이 안쓰러워서 그렇다고 치자, 하는 허용의 체념이었을 수도 있다.


반면 그 선배는 나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대답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나를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내가 나를 제대로 알기를 바랐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십 수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봐도, 선배의 얼굴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모르겠는 표정으로 울상이 된 나의 얼굴을 가만히 오래, 바라봐주었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이후로 나는 진지하게 나에 대해 알고자 했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아닌, 진짜 나를 알고 싶었다.


나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어렵고, 그에 대한 답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아직도 알아가고 있다. 말로 하자면 장황하고 당황스러웠던 그때가 자주 떠오른다. 그래서 쓰면서 이해하고, 읽으면서 알아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 선배의 표정을 하고 나를 가만히 바라봐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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