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의뢰인과 함께하는 안영진 변호사입니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연루된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전화 상담 업무라고 믿고 일했지만, 수사기관은 그를 사기죄의 공범으로 판단했습니다. 이 글은 그 청년이 실형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형량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던 과정과 그 뒤에 있었던 법률 전략을 담고 있습니다.
1. 지인의 말 한마디가 불러온 고수익 아르바이트의 덫
“진짜 쉬워. 전화만 받으면 돼. 걱정하지 마. 합법적인 대출 안내야.”
의뢰인은 그렇게 이 일에 발을 들였습니다. 20대 초반, 사회 초년생이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못한 채 여러 단기 일용직을 전전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월세, 생활비, 부모님 지원, 현실은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연락 온 지인이 소개해준 일이었습니다. 중국에 있는 콜센터에서 일하면 숙식이 제공되고, 한국 돈으로 월 400만 원 넘게 벌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습니다. ‘신용등급 상승’, ‘정부 보증 대출’ 등을 빌미로 전화를 걸어오거나 걸려온 사람에게 설명하고, 본인의 신원을 확인시킨 뒤, 다음 부서로 넘기면 끝이었습니다.
‘대출 승인 부서’, ‘보증보험 안내 부서’, ‘신용조회 팀’ 등 여러 부서가 나뉘어 있었고, 그중 의뢰인은 초기에 ‘접수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도 피해자의 계좌를 직접 받은 적은 없었고, 누군가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계좌번호를 불러준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조직적으로 설계된 ‘보이스피싱 콜센터’였습니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전화를 받고 개인정보를 넘겼고, 이 조직은 그 정보를 이용해 거액의 사기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히 몰랐던 이 청년이 있었습니다.
2. 사기죄 피의자, 법정에 선 ‘단순 직원’의 무게
문제는 귀국 이후 벌어졌습니다. 국내로 돌아온 지 몇 달 뒤, 경찰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담한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통보였습니다. 의뢰인은 처음에는 자신이 왜 조사를 받아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단지 전화 몇 통화했을 뿐인데….” 하지만 수사기관은 그를 사기죄의 공동정범, 또는 간접정범으로 판단했습니다.
적용된 법조는 형법 제347조.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규정입니다. 여기에 ‘제3자를 통해 이익을 취득한 경우’도 동일한 처벌이 이루어진다는 조항이 함께 적용되었습니다.
이른바 ‘보이스피싱 전화 상담원’은 피해자와 직접 대면하지 않았더라도, 범행 구조의 일환으로 기망을 유도하고 피해자를 조직의 흐름 속으로 유도한 점에서 공범으로 평가됩니다. 실제로 의뢰인은 6개월간 근무하며 10명 이상 피해자와 통화한 기록이 있었고, 피해액만 10억 원이 넘었습니다.
검사는 징역 5년을 구형했습니다. 단순히 ‘전화 업무만 했다’는 항변은 재판부에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화를 통해 피해자들의 경계심을 무장해제시키고, 결국 돈을 이체하도록 유도하는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3. 형사전문변호사의 개입: 자백, 진술, 전략, 그리고 시간과의 싸움
사건 초기, 의뢰인 측은 별다른 법적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당황했고,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저를 찾아온 것은 이미 경찰 조사가 마무리되고, 1회 공판이 열린 이후였습니다. 첫 공판에서 의뢰인은 반성의 태도는 보였지만, 수사 협조도, 피해자 합의도, 진술 정리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저는 곧바로 사건 기록을 분석하고, 그동안의 수사 경과를 파악했습니다. 가장 먼저 진행한 것은 ‘의뢰인이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리였습니다. 하루 평균 몇 통의 전화를 했는지, 전화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지, 매뉴얼은 존재했는지, 누가 지시했는지 등 세세한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냈습니다.
의뢰인에게도 강조했습니다. “모든 걸 말하세요. 숨기면 당신에게 불리합니다.”
의뢰인은 자신의 월급 계좌, 입금 내역, 지인과의 카톡, 중국 콜센터의 구조까지 낱낱이 진술했습니다. 이는 곧 수사기관과 재판부가 ‘피의자의 협조 태도’로 인식하게 되었고, 판결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가족과 지인, 지인들의 진술서, 반성문, 초범임을 입증하는 자료, 경제적 곤궁 상태를 보여주는 세금 내역 등을 모두 수집했습니다. 양형 자료로서, 단순히 ‘선처를 구한다’는 말보다 훨씬 강력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4. 피해자 합의의 현실과 법원의 판단 기준
보이스피싱 사건의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는 피해자와의 합의입니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는 10명이 넘었고, 피해액은 각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대였습니다. 피해자들의 심리적 충격과 경제적 피해는 매우 컸고, 일부는 “합의는 절대 없다”며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피해자와 합의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피해액이 가장 큰 2명의 피해자와 우선 접촉했고, 의뢰인의 진심 어린 사과와 일부 변제를 조건으로 형사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결과적으로 총 피해액의 약 40~50% 수준을 합의할 수 있었고, 이 점은 재판부에도 명확히 전달되었습니다.
법원은 보이스피싱 사건에서 단순히 ‘합의했느냐’보다,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중요하게 봅니다. 피해자가 완강히 거부해도,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합의를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 자체로 정상 참작이 가능합니다.
5. 징역 2년 실형, 그러나 전략은 통했다
결국 판결은 징역 2년 실형이었습니다. 집행유예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이는 피해 규모와 피해자 수가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판결이 결코 나쁜 결과는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검사가 구형한 형량은 징역 5년이었고, 실형은 그보다 절반 이상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양형에 반영했다고 밝혔습니다.
범행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한 점
월급, 조직 구조, 입금 계좌 등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밝힌 점
피해자와의 부분적 합의가 이뤄진 점
초범이고, 경제적 곤란 등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던 점
귀국 후 스스로 체포되지 않고 수사에 응했던 점
결국, 철저한 전략, 조기 개입, 진실된 태도, 현실적인 합의 시도는 의뢰인을 구속상태에서 최소한의 형벌로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단순히 전화만 했다’고 주장하며 부인했더라면, 징역 5년 혹은 그 이상도 가능했을 상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