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칠곡 가시나들>를 감상하고
“나는 박금분 할머니면서, 학생이다!”하는 당찬 선언과 함께 발랄한 bgm이 깔린다. 영화 초반의 장면들은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의식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가시내들~~”하며 울려퍼지는 경쾌한 노랫소리와 함께 클로즈업된 할머니들의 사진이 교차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복 단체 사진. 주름졌지만 해사한 얼굴, 글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 수줍은 미소.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이 영화는 글공부를 시작하는 할머니들의 힘찬 발걸음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방식이 꽤나 유쾌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경쾌한 첫 걸음을 뗀 이 영화는 사실 중대하고 난해한 주제를 다룬다. 첫째는 문해력의 의미이고 둘째는 ‘나이듦’의 의미이다. 이 영화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 사회적인 맥락이 녹아있다. 동시에 할머니들의 생활 면면을 보여줌으로써 ‘나이듦’에 대한 고찰을 풀어놓는다. 이 영화는 본질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재기발랄한 분위기로 이끌어나가고, 그 일등공신은 칠곡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의 웃음소리, 실소를 자아내는 농담, 맑고 투명한 미소, 공부에 전념하는 모습들이 모여 밝은 에너지를 발산해낸다.
우선 문해력부터 살펴보면, 이 영화는 문해력이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임을 보여준다. 글은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매개체다. 이 부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우체국 장면이다. 할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쓴 후 우체국에 방문해 편지를 직접 부친다. 할머니는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우며, 그래서 우체국에 가본 적이 없다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이 장면은 글이 소통의 활로인 동시에 글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소중한 도구임을 의미한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장애물이 도처에 널려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모든 것이 글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글을 모르는 할머니는 우체국에 가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는 농협 조차 가보지 않은 농촌 할머니들이 많다는 실제 사례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글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세상과 그냥 부딪혀 볼 힘이 생긴다.
이 영화에서 무게를 두는 또 다른 주제의식은 ‘나이듦’이다. 이 영화는 ‘학생’과 ‘노인’이라는 어색한 조합을 통해 ‘나이듦’의 의미를 더듬어간다. 박금분 할머니는 손을 번쩍 들며 “나는 학생이다!”하고 당차게 선언을 한다. 학생은 주로 젊음의 표상으로 통용되지만, 할머니들은 학생에 담긴 젊은 에너지를 당당하게 흡수해버린다. 배우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밝고 우렁차게 노래를 부른다. 무기력하고 힘든 삶으로 그려지는 ‘나이듦’의 편견 어린 이미지는 산산조각 난다. 그 대신 생동감과 명랑함이 ‘나이듦’의 영역에 편입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천진난만한 할머니의 좌충우돌 글 배우기’ 정도로 납작하게 압축하지 않는다. 화사하고 밝은 느낌이 이 영화의 지배적인 정서지만, 애잔함과 애달픔이 곳곳에 스며든다. 함께 손을 부여잡고 병원에 가는 장면, 아들의 편지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제사 장면. 이러한 장면들이 이 영화에 끼어 들어 밝은 색감에 약간의 어두운 톤을 채색한다. 그러나 이 밝음과 어두움은 이질적인 느낌에도 불구하고 겉돌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져 색다른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상반되는 두 개의 정서가 균형감 있게 자리 잡는다. 고단함과 생동감, 죽음과 삶, 서정성과 재기발랄함. 상반되는 두 개의 에너지는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면 대비되는 정서와 분위기가 묘한 공존을 이루며 감동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를 능수능란하게 교차하는 주된 장치는 바로 음악과 시이다. 음악은 밝음과 어두움의 정서를 각각 뚜렷하게 표현하고, 시는 애틋함과 쾌활함을 동시에 품는다. 예컨대 박월선 할머니의 시 <사랑>이 그렇다. “사랑이라 카이 부끄럽따. 내 사랑도 모르고 사라따. 젊을 때는 쪼매 사랑해조대 그래도 뽀뽀는 안해밧다.” 시는 세월의 덧없음, 삶의 고단함을 이야기하지만, 낭송 직후에 멋쩍은 웃음과 함께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짓말”에는 유쾌함이 배어있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나이듦’이란 ‘젊음’과 배타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한 사람의 삶은 지층이라고 생각한다. 흙과 돌이 쌓여 지층이 층층이 형성되듯, 나이가 들 때마다 세월이 겹겹이 쌓인다. 이에 따라 지층의 무늬는 변하지만, 그 이전의 무늬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삶도 마찬가지다. 노인들은 젊은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 젊음의 시절을 껴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젊음과 나이듦은 단절된 것이 아닌, 연속적인 것이다. 몸이 아픈 할머니들이지만 여전히 배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살고, 활달한 성격을 감추지 못하고 해맑게 그네를 타며 함께 어울려 논다. 이 영화를 통해 나이가 적든 많든 인간이라면 공유하는 여러 빛깔들을 잊고 산 것은 아닌지, 되짚어보게 된다.
이러한 내용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바로 ‘연대’이다. 사실 이 영화를 끌고 나가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바로 정과 연대이다. 할머니들 간의 활기찬 대화는 나이듦과 외로움을 동일시하는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킨다. 할머니들은 수업시간에 동료들과, 그리고 선생님과 정을 나눈다. 이러한 연대의식은 이 영화에 흐르는 두 가지 상반된 정서를 하나로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아프고 애달픈 삶이지만 함께하기에 삶을 버텨가고, 왁자지껄 수다를 떨면서 글공부에 대한 의지를 다져간다. 한 할머니가 시설 좋은 경로당보다 칠곡 할머니와의 수다가 그립다고 말하듯이, 이들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버티게 한 원동력은 정과 연대였다.
이렇듯 이 영화는 장르를 넘나들며 신선하고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글자를 틀릴 때마다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는 할머니들의 얼굴에서는 하이틴 장르를 엿본다. 자식에 대한 걱정, 제사 장면, 병원 장면에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다큐멘터리 장르를 볼 수 있다. 한편 칠곡 공부 모임이 나들이를 떠날 때, 그네를 탈 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는 코미디 장르가 따로 없다. 어쩌면 이 영화는 ‘나이듦’과 ‘삶’의 본질이 다양한 장르의 결합, 다채로운 정서의 하모니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러 분위기의 결합 속에서 이 영화를 단단하게 붙들어주는 것은 할머니들 간의 끈끈한 호흡이다. 이 영화의 분위기를 여실히 엿볼 수 있는 시 한 편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사람의 귀엽고 애절한 고백이다.
“몸이 아푸마 빨리 주거여지 시푸고 재매끼 놀 때는 좀 사라야지 시푸다. 내 마음이 이래 와따가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