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지 못하는 자유

일상 속 작은 틈새

by 빙빙

노트북이 멈추었다 멈추었다기보다는 정확하게는 충전을 거부하였고 충전되기를 거부한 노트북은 그렇게 자신이 품고 있던 전력을 모두 소진하고 나서 무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가로 35.79cm 세로 24.59cm에 인텔 i7 cpu 칩이 들어있고 16G DDR4 온보드 메모리를 갖춘 이 노트북은 그저 알루미늄에 쌓인 2kg의 얇은 벽돌이 되었다 노트북에서 우주선에서나 쓰일 듯한 스페이스 그레이의 벽돌이 되기까지 채 24시간이 안 걸렸다 마지막 10분은 나도 그리고 노트북도 각자의 사정으로 매우 격렬하게 토로하였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목표한 업무를 끝내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빠르게 노트북을 배터리 0% 상태로 만들어 IT헬프데스크의 직원이 요청한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 투박한 두 손을 양끝으로 움직이며 연신 노트북 위를 종횡무진했다 그리고 노트북은 배터리 잔량 표시 막대바를 붉은색으로 바꾸며 설정된 명령어에 따라 나에게 빠르게 전원을 공급하지 않으면 노트북으로서 나의 명령을 따를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정중하게 그리고 여러 번 경고하였다 우리 둘 다 서로의 목적 앞에 서로를 바라보며 그 길면서도 짧은 10분 보내었고 마지막 배터리 잔량이 2% 일 때 나는 두 손을 위로 들어 패배를 표시한 뒤 화장실로 슬그머니 떠났다 그리고 돌아온 자리에 우둑하니 있는 노트북의 옆구리를 살짝 찔러보았다 그러자 노트북은 얼굴을 깜빡이며 이제 자신은 그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으며 그저 내가 할 일은 전기를 자기에게 주는 것이라며 굳이 얼굴을 붉혀가며 보채었다 나는 IT헬프데스크에서 알려준 매뉴얼대로 얼른 전원 케이블을 연결해 보았다 왼쪽 오른쪽 옆구리에 있는 네 개의 구멍에 번갈아가며 그리고 케이블 커넥션 부분을 상하를 반전을 만들어가며 계속 끼워보았지만 이미 얇은 벽돌로 변신한 금속 물체는 나에게 그 어떤 기적의 순간도 만들어 주지 못하였다 결국 나는 노트북이라는 그와 - 그녀일지도 - 함께 IT헬프데스크가 있는 건물 제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많이 떨어뜨려서 일 수도 혹은 그냥 노트북이 수명을 다했을 수도 여러 가능성은 있지만 야속하게 스스로 아파진 노트북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약은 약사에게 병은 의사에게라는 명언을 따라 IT헬프데스크 직원에게 그 얇은 회색의 벽돌을 맡겼다 그는 - 헬프데스크 직원은 - 좀 더 나의 그를 진찰해야겠다고 했고 나에게 자리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 결과 나는 오전 9:30부터 노트북 없이 회사를 활보하고 있다 노트북이 없어진 것뿐인데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다 내가 응당해야 하는 일을 못하는 상황 때문일까 천연한 듯 있지만 나는 사람들 사이의 미묘함을 감지하고 있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어도 내 뒤통수에 달린 눈이 마구 굴러다닌다 하여 점심시간 읽던 책이 있음에도 충동적으로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사서 회사의 반대 방향에 있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책의 첫 장을 첫 글자를 따라 읽는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 내가 맞이한 상황이 정말 딱 무의미의 축제일지도 모르겠다 무의미함 노트북이 벽돌로 변신한 것 또한 아무 의미가 없는 상황이다 그도 자신이 벽돌로까지 바뀔 줄 알았을 리 없다 이 상황은 그도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물론 그는 곧 영면을 맞이할 상황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 2년이 되면 우리는 헤어지고 그는 영면을 맞이하는데 그 2년이 꼭 한 달 하고 이십일 남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면의 시점이 좀 더 당겨진 것임은 맞다 하지만 아직 나는 이별까지는 손속에 넣지 못하여 그의 가슴속에 나의 비밀과 이야기들을 한가득 넣어두었고 그가 영면을 맞이하면 사라질 그것들을 지금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다 하여 구질하지만 지금은 그가 되돌아 와주기를 고대하고 희망하고 있다 간절하게 결국 이런저런 상황들로 인해 나는 공식적 자유를 얻었는데 회사라는 독특한 무대 장치로 인해 맘껏 누리 지를 못함이 살짝 서글프지만 공간적 한계를 심적 한계로 풀어보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래서 오프라인 서점을 가서 직접 충동구매를 해보았다 인터넷이 아닌 실제 가게에 가서 충동구매를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곰곰이 생각을 더뜸더뜸 거랴보니 책을 이렇게 구매한 것은 20대 이후 처음인 것 같다 - 30대 초반 일지도 - 하여 청개구리 같은 행동을 한 나는 그냥 햇살과 바람을 맞이한다 에어컨의 병풍 속에 갇혀 살기 싫어 그냥 밖으로 밖으로 마음속 누군가가 이끄는 데로 나왔다 커피 한 잔 없어도 괜찮다 다만 내가 구매한 책의 종이 커버를 벗기자 그 안에 보라색의 자색고구마 같은 살색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부분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얻었지만 이 또한 의미하는 바를 곱씹어 보면 의미 없다 아침 출근길에 봤던 뉴스 따라 태풍이 올라온다더니 정말 하늘이 흐려진다 이런 날은 집으로 돌아가 근무를 이어가고 싶지만 나는 노트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하여 오늘의 무의미의 축제를 즐겨보련다 광란의 축제를 말이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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