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의 박탈과 재현의 허탈감
감자꽃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것도 창고에 버려둔 박스 사이에서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어서 말이에요 4월의 어느 날 주말이었고 저는 찌뿌둥한 몸을 밀어내며 허리를 꺾어 스트레칭을 한 번 한 뒤 심호흡을 하고 창고 문을 열었어요 겨우 내 처넣은 여러 가지 것들이 뒤엉켜서 정리하는 게 쉽지 않을 거다라고 속으로 단디 마음을 먹고 열었죠 근데 창고의 선반 한쪽에 무언가 살아있는 생물이 그것도 너무 어여뻐서 우리 집 누추한 창고에 어울리지 않는 경이로운 생명체가 있었어요 햇볕을 맞아 얇은 꽃잎에 보라색이 물감으로 풀어넣은 것처럼 퍼져있고 꽃술 근처에는 녹색의 별이 그리고 가장 중앙엔 단단한 노란색의 가늘고 긴 대롱 끝에 꽃술이 있었어요 저는 제가 봤던 모든 꽃이름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려봤어요 데, 데이지, 데이지랑 닮았는데 묘하게 독특한 꽃이었어요 그리고 그 꽃이 삐져나온 상자에 무엇이 담겼더라 곰곰하게 생각해 보았죠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가물가물한 저이기에 겨우 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꽤나 고단하고 어려운 작업이었죠 어쩔 수 없이 창고 안에서 낮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십여분 씨름하고 있을 때 그냥 박스를 열어보면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바, 바보, 말하고 나니 더 바보스러워지고 싶어 졌어요 무조건 머리에서 단어를 꺼내고 마리라는 결심을 해버렸죠 박스를 계속 노려봤어요 하얀색의 신발 박스였죠 신발 박스 흐음 무언가 다른 곳에 있던 걸 그곳에 옮겨놓은 것 같았어요 박스에 난 구멍으로 검은색의 비닐봉지가 보였어요 봉지째 박스에 넣었구나 싶었죠 봉지째 봉지째 봉지째 도대체 내가 무얼 넣은 거지 양쪽 관자놀이를 검지와 중지를 펴서 안테나처럼 짚었어요 아, 아,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가 백지였어요 다른 방식을 써야만 했어요 소위 힌트를 얻어야 하는 시점이었어요 엄마 찬스를 썼어요 엄마, 엄마가 나한테 겨울에 준 게 뭐가 있지, 뭔 소리하니, 아니 잘 생각해 봐 나한테 싸준 것들이 뭐였지, 김치, 장아찌, 아니아니 그런 거 말고 봉지에 싸줄 수 있는 거, 옥수수 얼린 거, 아니야 밖에 놓아도 되는 거, 귤, 고구마, 양파, 어, 엄마, 고구마가 꽃이 피어, 피긴 피지 근데 잘 안 펴, 무슨 색인지 알아, 흰색에 가운데 보라색, 어, 그거다, 무슨 말이야, 창고에 엄마가 준 무언가에서 꽃이 피었어 근데 고구마꽃 같아, 하하하하하하 스무고개 끝에 알아낸 정답을 들은 엄마가 쓰러질 듯 웃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렸어요 고구마는 9월에 펴, 지금 폈으면 감자꽃일 거야 너 감자를 어떻게 한 거야, 그냥 창고에 넣었는데 잊어버렸어 근데 꽃을 피웠어 엄청 예뻐 엄마, 감자꽃 예쁘지 보기 힘든데 우리 딸 대단하네, 아니지 감자가 대단하지 내가 물도 한 번 안 주고 살아있는지도 몰랐는데 박스 뚜껑을 꽃대로 밀어 올리고 꽃을 밖으로 피워냈어 그것도 엄청 많이 예쁘다 예뻐, 이제 창고에서 꺼내서 물 주고 꽃병에 넣으면 되겠다, 그래 그래야겠다 엄마 고마워 감자꽃 감자꽃이었어요 감자꽃을 본 적이 있으세요 정말 예뻐요 정말로요 아마 선생님도 보신다면 마음에 쏙 드실 거예요 그런데 감자꽃은 보기가 어렵대요 감자알을 크게 만들기 위해 감자꽃대를 다 자른대요 슬픈 이야기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데 피울 기회조차 박탈당하다니 말여요 그 어여쁜 꽃이 식재료로써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연스러움을 인간이 강탈했어요 인간의 폭력성이 느껴졌어요 그동안 먹었던 감자들에게 미안함을 느꼈어요 선생님도 아마 그 감자꽃을 본다면 필히 저와 유사한 감정을 느끼실 거예요 제가 오버한다고 생각할 수 없으실 거여요 그 뒤로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유럽에 감자가 처음 퍼지고 감자를 먹고 사람들이 그 독성으로 죽어나가던 시절에 감자는 식용식물로 환대받지 못해 결국 관상용으로 키워졌대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감자꽃을 좋아해서 감자꽃 브로치를 하고 다녔다고 하네요 감자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독을 내뿜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표독스러운 인간들은 싹이 나기 전에 먹으면 괜찮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감자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죠 감자는 인간과의 꽤 오랜 전쟁에서 결국 패배했어요 슬픈 이야기죠 새드 엔딩이에요 저는 새드 엔딩이 싫어요 저라도 감자꽃의 해피 엔딩을 느끼고 싶었어요 그래서 냉장고에 감자를 꺼내 조각을 내서 베란다에 화분을 하나 사서 심었어요 세심하게 물도 주고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 꽃이 안 피었어요 그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요 감자꽃대를 자르지 않았는데도 심지어 시장에 가서 감자를 사왔는데도 꽃이 피질 않아요 제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요 선생님 저는 너무 슬퍼요 좌절하고 있어요 그 어여쁜 꽃을 다시 보고 싶은데 오직 제 마음속에만 있어요